은둔의 메밀 고수
쉬는 날, 느즈막히 일어났다. 비오고 갠 뒤, 쨍한 날씨에 발길 닿는대로 동네 식당 문 연 곳에 들어가서 비빔메밀국수와 만두를 주문했다.
1996년부터라... 30년이 다 되어가는 가게구나. 심드렁하게 넋놓고 있다 주인 할머니가 내주신 음식상을 보고 정신이 좀 들기 시작한다. 허름한 가게 외관과는 달리 먹음직하고 멋스러운 고명. 호방하고 시원한 그릇. 호기심이 생긴다. 식욕이 돈다.
살얼음이 뜬 국물을 일단 한 숟갈 떠보는데,
어…? 이거 심상치가 않다.
잡내가 전혀 없으면서 상쾌하게 진한 육향의 육수라니?
말만 평양냉면으로 써붙이고 2만원 가까운 가격에 기분 나쁜 고기 잡내가 고릿하게 나는 육수를 내는 식당들과는 격이 다른 육수다. 구수하면서 상쾌한 맛이랄까.
면은 적당히 탄력있고 차분한 맛이다. 심심하지 않을 정도로만 거칠게 메밀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옛날 동네에서 같이 눌러 나눠 먹던 그 때 면의 맛과 비슷하다.
어릴적 나는 ㄷ자 모양의 마당이 있던 한옥집에서 살았는데 주인집, 우리집, 옆집, 건너방 회사다니는 누나까지 4식구가 같이 살았다. 마당 평상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식사를 자주 같이 했었고, 모기장을 치고 화롯불도 키고 수박이랑 옥수수를 먹다가 주인집 할머니네 아가들이랑 같이 잠들곤 했다. 국수를 먹는 일도 흔했는데,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신문에 돌돌 말아 가지고 온 하얀 소면을 삶아 먹는 게 아니라 메밀면을 직접 내려 먹는 이벤트가 마당에서 열렸다. 이 때 어른들은 옛 생각이 난다며 신나게들 면을 눌렀고, 동네 사람들도 지나가다가 들러 한 그릇씩 먹고 갔다.
메밀은 “메”가 붙은 그 이름에 걸맞게 아무 곳에서나 잘 자란다. 하지만 아무 곳에서나 잘 생장하는 것과는 달리 도정이 어렵고 메밀가루로 만들어진 반죽도 뻑뻑하고 단단하다. 마당에서 메밀면을 만들던 날 내가 보았던 메밀면의 반죽 역시 아주 딴딴했다. 어른 두 명이 쇠로 된 틀에 그 반죽을 넣고 체중을 실어 면을 누르던 것이 기억난다. 면이 나오는 아래에는 뜨거운 물이 큰 들통에 담겨 있었는데 그 물에 면이 들어가면서 면이 익었다. 그때 따뜻한 물에서 나는 메밀 향이 참 좋았다.
맛있는 면에 기분좋게 매콤달콤하면서 태양초와 들기름 향이 슬쩍 나는 양념이 어우러지니 젓가락질을 멈출 수가 없다. 아우 맛있어. 조금 매워져 만두를 한입 베어 무는데, 이것도 대박이네…
나는 사실 만두 마니아라서 팔도의 만두 맛집이라는 맛집은 꽤나 다녀보았다. 만두 솜씨는 소와 피 이 둘에다가 찌거나 굽는 조리법으로 드러나는데, 이 집은 어지간한 맛집들 이상으로 솜씨가 좋다. 소가 곤죽이 된 어중이떠중이 시판 만두와는 비교할 수 없다. 메밀향이 은은하게 퍼지는 만두피에, 씹히는 맛이 살아있는 소 재료와 적당한 간까지. 식초 없이 간장과 참기름 그리고 깨 가득 들어간 옛날식 양념장은 오랜만에 그것대로 좋았구.
동네에 이렇게 내공있는 식당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복이다. 잡스러운 것이 하나 없이, 메뉴 그 자체에 정성을 집중하여 완성도 있는 요리를 내놓는 집. 시크하게 재료를 다듬고 있는 주인 할머니께 혹시 그냥 묵만 파시냐고 여쭤보니 “별난 총각이네” 허허 웃으시며 한 덩이 썰어주신다. 집에 와서 묵을 먹어보니, 고소해라! 역시나 맛있네. 담엔 메밀묵에 막걸리를 마시러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