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ngi, 유라시아 여행기 : 상트페테르부르크 편 #2
Time is ticking, T Time is ticking.
시간은 째깍째깍 흘러 어느덧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할 시간이 다가왔다. 3박 4일로 떠나는 일정. 카자흐스탄 생활에 매너리즘에 빠져있을 때 즈음 찾아온 광명의 순간이다. 나는 유럽여행이 출발하기 전까지 알마티 공항에 가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물론 영원히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비행기를 탑승 그 자체만으로도 나에게는 한 줄기 빛이 됐다. 하지만 시작부터 난관이다. 전날 짐을 미리 싸고 금요일 수업이 끝나자마자 공항으로 가기로 합의를 했었다. 그런데 동욱이란 친구 한 명이 짐을 하나도 안 싼 데다가 수업까지 늦게 끝나 자칫 잘못하면 비행기를 놓칠 수도 있는 상황이 온 것이다. 남자들끼리라 하나둘 욕설이 나오기 시작한다. 순간 불쌍한 느낌도 들었지만, 시간이 충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태까지 다다른 것은 충분히 욕을 먹을만 했다고 본다. 중국인도 아닌데 싱가포르 친구들과 대화를 하다 보니 나도 '콰이콰이 (빨리빨리)'란 말이 절로 나왔다. 그래도 늦지는 않았다. 그 친구는 백팩에 속옷이랑 양말만 몇 개 넣고 나왔다. 오늘따라 택시도 왜 이렇게 안 잡히는지. 시작부터 조짐이 좋진 않지만 액땜했다고 생각하고 공항으로 간다.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르겠지만, 알마티 공항은 참 작다. 부산 김해공항보다 작다고 느껴졌다. 그래도 나름 과거에 한 나라에 수도였고, 중앙아시아 지역의 중심을 자부하는 곳인데 말이다. 항공은 러시아 '아에로플로트(AEROFLOT)'를 이용했다. 알마티-상트페테르부르크 間 항공료가 30만 원도 안 됐고 비행기 좌석도 좁아서 저가 항공인 줄 알았는데, 러시아 국영 항공사였다. 어쨌든 나는 간다. 제정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나는 이 때까지만 해도 비행기를 타는 것이 세 번째라서 모든 비행기는 게이트 통로를 통해 가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웬걸? 갑자기 버스를 타고 멀리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게이트 통로는 큰 비행기를 우선으로 배치된다는 것을 그땐 몰랐다. 밖에는 눈이 쌓여있었는데 활주로가 빙판길이 되지 않았을곘느냔 우려도 살짝 있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들은 기우였고 무사히 모스크바를 경유해서 상트페테르부르크 풀코보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착륙할 때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와 함께. 이는 비행기를 탈 때 구소련 지역 국민의 문화 중 하나인 것 같았다.
화려한 조명이 나를 감싸네~♬
단체로 움직이면 장점이 한 가지 있다. 공항에서 버스를 타나 택시를 타나 가격 차이가 별로 크지 않다. 그래서 공항 인포메이션에서 목적지를 말하고 안전하게 콜밴을 타고 숙소로 향했다. 아직 밤 8시밖에 안 됐지만, 한밤중과 같은 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리고 택시가 상트페테르부르크 '넵스키대로'에 들어서자 상상과는 다른 모습이 나를 당황하게 하였다. 어느 유럽 도시도 부럽지 않은 화려한 조명이 도시를 감싸고 있었다. 마치 유럽 한가운데에 발을 디딘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우리는 모두 연신 감탄사를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가로등이 불빛이 약해 음침함을 자아내는 카자흐스탄의 밤과는 달리 화려한 밤의 도시 빼쪠르. 이것 하나만으로도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충분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택시를 멈춰 세우고 내려서 걷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살이 아릴 정도의 러시아 대륙 추위 클라쓰!
마침내 숙소에 도착했다. 호스텔에서 다른 사람의 방해를 받지 않게끔 Family 룸으로 예약했다. 숙소까지 올라가는 길은 마치 감옥을 연상케 했지만, 방 컨디션은 아주 좋았다. 시간이 많지 않다. 일단 밖으로 나가 주변을 돌아보면서 늦은 저녁 식사를 하기로 한다. 그리고 밖에 나오자마자 문제가 하나 생겼다. 너무 춥다. 알마티는 그래도 바람이 거의 불지 않아서 체감 온도는 낮은 편이 아니다. 그렇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칼바람이 매섭게 불어와 실제 기온보다 최소 -5도는 떨어지는 것 같았다. 이런 미친듯한 추위를 겪어본 적이 있는가? 특히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았고, 이대로는 여행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때마침 우리 눈앞에는 H&M 매장이 보였다.
당시는 러시아 루블화 폭락이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어서 환율 때문에 가만히 앉아서 50% 세일하는 효과를 봤다. 한국 H&M에서 긴 팔 셔츠를 하나 구매하려면 최소 2만 원에서 4만 원 사이의 금액을 지출해야 한다. 하지만 이날은 모든 셔츠가 비싸 봐야 한화 15,000원이었다(약 500루블). 그렇다면 쇼핑을 안 할 수가 없지. 방한복을 사야겠단 생각은 사라지고 미친 듯이 예쁜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종국에는 귀가 시렸던 것이 생각났는지 태어나서 처음으로 군고구마 장수 털모자도 하나 골랐다. 비로소 빼쪠르를 정복할 수 있는 장비가 완비됐다. 본격적으로 거리로 나가보자.
진정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찾는데 있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게 되는 것에 있다.
-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 (Marcel Proust)
그렇게 칼바람이 몰아치는 빼쪠르 거리를 한참 돌아다녔다.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말처럼 지금 새로운 눈을 뜨는 중이다. 내가 정말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란 사실을 새삼 깨달아 버렸다. 나는 이전에 회계사 공부를 하면서 페이스북을 통해 지인들이 해외여행을 다니는 것을 마냥 부럽게 봤다. 여권을 새로 발급받는 것부터 비행기 표 예약, 여행 코스 계획 등 모든 것이 두려워서 그냥 부러워만 했었다. 하지만 처음이 어렵지 한 번 여행의 맛을 알게 되면 도저히 멈출 수가 없다. 계속 떠나고 싶고 사라지고 싶다. 모두가 비슷한 생각과 경험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앞으로 또 어떤 것을 보고 느끼게 될지 설레서 미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주변 한 바퀴를 돌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배가 고파오던 찰나에 러시아 로컬 햄버거 가게가 보인다. 우리는 암묵적인 동의를 하고 자연스럽게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햄버거 가게에서 생맥주를 같이 판다는 사실! 당시 한국에서 단 한 번도 햄버거집에서 맥주를 같이 판매하는 것을 못 봤었다. 그리고 기본 버거와 함께 러시아 '발찌까' 생맥주도 함께 주문했다. 100루블짜리 햄버거의 속은 단출했다. 패티와 양상추뿐. 그렇지만, 맛은 단출하지 않았다. 똑같은 소고기를 간 패티인데 왜 이 버거는 씹는 식감이 굽는 고기랑 비슷할까? 소고기 본연의 맛이 진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맥주 한 모금이 목으로 넘어가는 순간, 난 이 도시와 사랑에 빠지게 됐다. 그것은 '천국의 맛'이었다. 러시아 음식이 맛없다지만, 창가 자리에서 아름다운 도시의 조명을 보며 맥주를 마신 후 몸에 따스한 기운이 생겨나니 어찌 이곳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까? 햄맥의 조합으로 이렇게 행복할 수 있을 줄이야! 놀라웠다.
그리고 돌아온 숙소 안. 이야기꽃이 끊이질 않는다. 앞으로 어떤 이야기가 우리 눈 앞에 펼쳐질 것인가? 내가 모든 것을 알아보고 준비한 이번 여행, 두려움보단 기대감이 점점 더 커지고 있는 중이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