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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그니pogni Sep 11. 2020

굿바이, 빼쪠르! : 호박방을 찾아서, 예카테리나 궁전

Pongi, 유라시아 여행기 : 상트페테르부르크 편 #8



(좌) 러시아 현지식 올리프 수프 / (우) 러시아식 치킨 스테이크



여행을 떠나면 겸손해진다. 내가 사는 곳이 얼마나 협소했는지 알게 해 주기 때문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이 밝았다. 3박 4일이 3.4초 만에 지나간 느낌이다. 해외여행을 하면서 느끼는 사실은 군대에서 휴가 나왔을 때보다 시간이 배 이상으로 빨리 흘러간다는 것이다. 여행 일정 전반부 50%까지는 날아갈 듯이 기분이 좋다가도 마지막 날이 다가오면 복귀해야 한다는 사실에 좋다가도 갑자기 우울해지기도 한다. 아무튼 백팩에 모든 짐을 구겨 넣고 정들었던 호스텔을 나와 일단 근처에서 아침 식사를 해결하기로 한다. 오늘도 밥은 러시아 현지식이다! 그렇게 맛이 없다고 소문난 러시아 음식인데, 카자흐스탄에서 정말 입맛에 안 맞는 현지식을 돈 아끼려고 계속해서 먹으니까 나는 너무 맛있게 먹었다. 발병은 오늘도 낫지 않았다. 그렇지만, 오늘은 빼쪠르에서 마지막 날이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서 걸어야 한다. 그렇다면 먹어야지. 든든하게 치킨 스테이크와 러시아식 올리브 수프를 골랐다. 일명 '레드 수프'라고 불리는 러시아 전통식 보르쉬가 유명하지만, 왠지 나는 저 기름 둥둥 떠다니는 수프를 먹고 싶었다. 혹독한 러시아의 겨울을 이겨내고 걸어 다니려면 저 정도의 지방은 필요하지 않을까란 그런 생각이 들어서다.


  든든하게 먹고 이제 대미를 장식할 마지막 여행 장소로 떠나보자! 마지막 여행지는 '호박방'이란 소설책을 읽은 후부터 관심이 있던 곳. 진짜 호박방이 있는 제정 러시아 사치의 끝판왕 '예카테리나 궁전'으로 떠나본다. 이곳은 마치 태양왕 루이 14세를 동경하는 것 같았던 제정 러시아 황실에서 베르사유 궁전만큼이나 사치스럽게 건설한 궁전이다. 황금빛을 띠는 모든 것들이 도금이 아니라 진짜 황금이라고 하는데, 일단 직접 가서 봐야겠다. 여기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에서 약 1시간가량 떨어져 있다. 지하철이 나름대로 발달한 빼쪠르인데, 만약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가려면 지하철 마지막 역까지 와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야 하는 수고를 해야 한다. 당시엔 한국인에 대한 러시아에서 무비자 허용이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라 정말로 가는 방법을 찾는데 애를 많이 썼다. 그런데, 밥을 먹고 나니 시간이 애매해서 단체로 택시를 타고 가서 이런 내 수고는 헛수고가 됐다. 물론 나도 편했지만 준비한 것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의 허무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예카테리나 궁전으로 들어가기 전에
(좌) 예카테리나 궁전으로 들어가는 길 / (우) 모든 관광객은 아래와 같이 덧신을 신어야 한다.



  아참, 여기서 소개가 늦은 두 명이 있다. 경성대에서 온 같은 KIMEP 한국인 교환학생 미소와 휘진이. 원래 같이 여행 계획을 짰던 것은 아닌데 우연히 일정이 맞아서 마린스키 극장 발레 공연부터 함께하고 있다. 우리는 돌아가지만 이들은 상트에 며칠 더 남아서 여행을 한다고 한다. 아무튼 택시에서는 친절한 고려인 택시기사를 만나 정확하고 빠르게 도착했다. 동족이라는 것이 뭔지 반갑기도 하면서 동질감이라는 것이 조금 느껴진다. 저 멀리서 러시아 정교회 느낌이 나는 황금색 아치가 보인다. 구글 지도를 켜보니 제대로 찾아온 것이 맞다. 저 황금 아치도 진짜 금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예카테리나로 들어왔다. 외관은 겨울궁전(에르미타주 미술관)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이게 바로 러시아식 궁전 건축 양식이겠지. 아직까지는 크게 감흥은 없다. 그리고 어디선가 들리는 시끄러운 소리. 중국인 단체 관광객이다. 여기뿐만 아니라 후에 갔던 유럽여행에서도 느꼈지만, 어느 관광지를 가나 중국인들은 바글바글한 것 같다. 말의 성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시끄럽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역시나 거슬리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두근두근....... 티켓팅을 하고 진짜 내부로 들어간다. 당시에 나는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밖에 안 가봤다. 두 국가에 유럽식 궁전이 있을 리는 만무하고, 벅찬 마음을 가지고 궁전으로 들어간다. 얼마나 고급 자재를 바닥에도 사용했는지 덧신을 신고 돌아다녀야만 한다.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그렇게 거슬리는 정도는 아니었다. 



실내가 번쩍이는 황금빛에 물들어 있다.
화려한 궁전의 접견실, 바라만 봐도 눈이 부실 지경이다.



  그저 감탄사밖에 나오지 않는 광경이 펼쳐졌다. 진짜 황금이 조명의 빛과 맞닿으니 더욱 화려하게 '내가 황금이다'라고 자신을 뽐내고 있다. 이렇게 으리으리하고 화려한 궁전에서 산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나중에는 무뎌져서 황금이 일반 대리석처럼 보이지는 않을까? 천장에는 에르미타주보다 더 화려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너무 넓어서 카메라로 한 번에 담을 수조차 없었다. 솔직히 어디든 입장료를 지불하고 어디든 건물 내부로 들어와서 만족스럽게 관광했던 적은 거의 없었다. 이 예카테리나 궁전이 거의 유일한 사례인 것 같다. 미쳤다, 그저 말도 되지 않는 풍경에 빠져들고 있다. 여행의 이유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는 세상을 보는 시야의 확장. 그렇다, 지금 세상을 보는 내 눈은 넓어지고 있는 중이다. 진짜 여행을 하면 겸손해지는 것 같다. 내가 살았던 내 세계가 한없이 협소하게 느껴진다.


  MG 투어의 마지막 여정, 정말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일행 모두가 감탄하면서 구경하고 있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이 끝나지 않았으면. 그리고 카자흐스탄 생활에 지쳐가고 있었던 터라 그냥 돌아가기 싫어졌다. 지금이야 여름휴가 때 여행을 다녀오면 다음 해까지 힘든 회사 생활을 버티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지만, 당시엔 허무함 그 자체였던 것 같다. 나는 지금 내 앞에 펼쳐진 것을 감탄하고 있지만, 곧 돌아가야 한다는 그 허무함. 그냥 카자흐스탄의 모든 것들이 싫었던 것 같다. 특히 KIMEP 대학교 현지 친구라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치여서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싶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방법이 없다. 앞으로 걸어가야지.



러시아 황실에서 가르치던 예법 수업이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카테리나 궁전 여행의 꽃, 그 유명한 '호박방'



  중간쯤 왔을까? 이국적인 풍경이 눈 앞에 나타났다. 러시아 황실 예법 수업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들. 강사는 중세 유럽 특유의 가발을 쓰고 교양 있는 어투로 가르치고 있다. 강사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엄청난 집중을 하고 있는 아이들. 그리고 뒤에서 흐뭇하게 쳐다보고 있는 부모들. 전 세계 어디를 가나 역시 애들은 귀엽다. 나도 잠시 가던 걸음을 멈춰 서서 무엇을 하는지 지켜본다. 러시아 말이라서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바디 랭귀지를 주시한다. 아주 이색적인 경험이었다. 이후에 다른 나라에 가서 이런 것을 봤던 적은 없었으니까.


  그리고 예카테리나 궁전 거의 끝에 다다랐을 때, 그토록 원하고 바랐던 '호박방'이 나타났다. 참고로 호박방은 궁전에서 유일하게 촬영이 금지된 구역이다. 위에 사진은 내가 찍은 것은 아니고 같이 갔던 일행 중에 한 명이 몰래 찍은 사진이다. 어쨌든 금지되어 있으니 규칙은 따르는 것이 맞다고 본다. 약 2,000년 동안 화석화를 거치면서 나오는 보석이 호박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 교과서에 보면 가끔 곤충이 호박 보석 안에 들어간 사진을 봤을 것이다. 아무튼 그만큼 희귀한 보석이라는 의미다. 이 호박방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빼쪠르를 점령했던 독일군이 통째로 다 뜯어갔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것을 24년에 걸친 복원 작업 끝에 2003년부터 공식 개방된 곳이라고. 이와 관련하여 본래 독일군이 뜯어간 호박방은 어떻게 됐는지 정확하게 알 길은 없다. 다만, 첫 번째로 이것을 보관하던 곳이 연합군의 폭격에 의해 사라졌다는 설과 몰래 개인 수집가 누군가가 보관하고 있다는 설이다. 두 번째 설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소설이 바로 호박방이다. 이 방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렇지만, 방에서 내뿜는 아우라는 어떤 곳과도 견줄 수가 없었다. 이곳이 바로 천국인가? 화려한 보석 빛에 눈이 멀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너무 아름다워서 나오기 싫었던 곳,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었던 곳. 아프로디테가 실제로 존재했다면 이곳에서 살았을 것 같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여행에서의 마지막 단체 사진, 잠시 당시의 나로 돌아가고 싶다.
갑자기 날씨가 흐려졌다, 들어왔을 때랑 천차만별인 날씨



  모든 관광을 끝내고 밖으로 나오니 날씨가 상전벽해란 사자성어가 떠오를 만큼 변해있었다. 원래 예카테리나 궁전은 아름다운 정원으로도 유명한데, 안개가 너무 짙어서 보는 것 자체가 무의미했다. 이제야 아팠던 발이 다시 아파오기 시작한다. 잠시 꿈을 꿨던 것이 아닐까? 황홀함과 돌아가야 한다는 허무함을 가지고 마지막 단체 사진을 찍어본다. 글로써는 꽤 길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3.4초 같았던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여행. 이 여정의 끝을 이제 마무리하려고 한다. 빼쪠르에 반한 몇몇 친구들은 모스크바 환승 시, 돈을 더 지불하고 스탑오버 시간을 넣어 모스크바에 이틀 정도 더 있다가 온다고 한다. 나도 가고 싶었지만 수업 시험이 있어서 돌아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나뉘었고, 친구들에게 모스크바 여행이 너무 좋았단 얘기를 듣고 나는 다음 해 3월 홀로 모스크바로 떠났다. 지금까지 여러 유럽 국가들을 여행했지만, 아직도 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만큼 좋았던 나라는 없었다. 이상하다, 분명 날씨도 사나웠고 발병도 나서 제대로 여행하기 힘들었는데 말이다. 이런 상태를 반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까? 언젠가 지금의 아내를 데리고 다시 한번 이곳을 경험하고 싶다. 언젠가 이 날의 황홀했던 순간들이 다시 그때처럼 반짝 빛나며 다가왔으면 좋겠다.   - 끝 -



아에로플로트 항공을 타면 주는 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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