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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그니pogni Aug 30. 2020

Since 1860, 마린스키 극장 : 난 발레가 싫어

Pongi, 유라시아 여행기 : 상트페테르부르크 편 #7


이른 아침 표를 사러 가는 길, 마린스키 극장 주변은 한없이 평화롭다. 
1860년에 설립됐는데, '14년 당시 232년이나 됐다고?? 아래 문단에서 자세히 알아보자. (왼쪽은 구관 Marinski1, 오른쪽이 신관 Marinski2 건물이다.)



여행을 하면서 원치 않았던 코스를 억지로 따라갔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당시 나는 온갖 싫은 내색을 다하면서 꾸역꾸역 따라다녔던 것 같다. 발병으로 인해 왼쪽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그런데 이렇게 싫은 티를 내면서 내 의견을 표현하는 게 맞는 것일까? 아닐까? 단체 행동임과 동시에 개인의 만족을 추구하려고 떠난 여행에서 이런 생각이 든다.



  을씨년스러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11월 아침. MG 투어 2일 차다. 잠시 시간을 Rewind 해서 에르미타쥬 미술관에 가기 전으로 돌아가 보자. 저녁 타임에 발레 공연을 보는 것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즉흥적으로 나온 종민이란 친구의 의견에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투표를 해서 정해진 일정이다. 나는 당시 26년 인생을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영화, 연극, 박물관을 제외한 예술 활동에 대해 단 1원도 써보지 않은 사람이다. 자랑은 아니지만 지금까지도 뮤지컬 공연은 단 한 번도 보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나에게 발레 공연이라니! 솔직히 정말 투어에 넣고 싶지 않았다. 다수결에 의해 아침에 표를 사러가는 길에도 대놓고 탐탁지 않은 표정을 했다. 그런데 루블화 폭락으로 인해서 단돈 500 루블(약 9,000원)로 5등석이라도 볼 수 있다고 하니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만, 우리 중에서 러시아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어 당시 영어 페이지가 없던 마린스키 극장 홈페이지에서 표를 예매할 수 없었다. 그냥 우린 아침부터 남은 표를 현장 구매하려고 버스를 타고 무작정 극장으로 찾아갔다.


   잠깐 러시아 빼쪠르에 있는 '마린스키 극장'에 대해 설명하자면 이곳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과 함께 러시아 최고의 오페라, 발레 극장으로 손꼽히는 곳으로 1990년에는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되었다. 또한, 극장은 구관 Marinski 1과 신관 Marinski 2, 콘서트 Hall로 구분되어 있는데 우리는 신관으로 가서 현장 티켓이 남아있는지 확인했다. 솔직히 만약에 여기를 안 갔다면 딱히 갈만한 곳은 없었다. 그냥 시내 쇼핑몰에 가서 맛있는 저녁 식사를 하고 기념품 사는 걸로 끝냈을 것 같다. 다행히 5등석 표는 남아 있었다. 개인적으로 백조의 호수나 호두까기 인형 티켓을 구했으면 더 관심 갖고 봤을 텐데, 프랑스어로 공원이란 뜻의 '르 파르크(Le Parc)'란 작품이었다. 이것도 굉장히 유명한 발레 작품 중에 하나라고 한다. 대략적인 스토리는 프랑스 공원에서 남녀의 사랑 이야기 정도. 솔직히 좀 우울했다. 티켓이 없기를 바랐는데, 아쉬웠다. 그래도 이왕 이렇게 된 거 공연장에 가면 최선을 다해서 집중해봐야지.



(좌) 극장에 가기 전 빼쩨르 어느 거리에서 (우) 러시아 퇴근시간 지옥 버스를 타고 있다
마린스키 극장의 야경, 솔직히 빼쪠르 최고의 야경이라고 말하고 싶다.



  뒤로 감기를 중단하고 다시 저녁으로 돌아와 러시아 현지 소매치기 2명을 만났던 다사다난했던 2일 차 여행의 마지막 순서, 마린스키 극장 르 파르크 발레 공연 감상 시간이 돌아왔다. 퇴근시간 Rush Hour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공연 시간에 맞춰서 가는 버스 안. 우리는 딱 걸렸다. 80년대 우리나라처럼 승차권 매표와 검표를 하는 러시아 버스 도우미 아줌마가 있었다. 어찌나 힘이 좋은지 버스에 사람이 못 들어갈 거 같으니 힘껏 뒤에서 밀어버린다. 우리들은 밀리고 밀려 어찌어찌 버스 한가운데에 겨우 서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마린스키 극장에 도착할 때에는 우리 포지션이 거의 내리는 문과 가까워서 다행히 제대로 내릴 수 있었다. 나는 발병이 겨울궁전에서 더 심해진 상태로 버스를 탔는데, 어떤 느낌이었냐면 정말 살기 위해서 발을 지탱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가기 싫어 죽겠는데, 더 가기 싫게 만들었던 추가 요인이었다.


  아, 잠시만. 극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마린스키 극장 외관을 보고 잠시 멈춰 섰다. 이렇게 눈 부시게 아름다운 야경을 뽐내는 건물이 내 인생에 처음이었다. 비록 겨울궁전과 피의 성당 야경도 엄청났지만 이 극장을 따라오기에 많이 부족했다.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었다. 그렇다, 내 여행의 감동은 바로 이런 부분에서 찾아온다. 박물관도 그렇고 굳이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서도 그랬고, 런던 대영박물관에선 무료라서 잠시 스치듯 지나갔다. 어차피 돈을 지불해도 그만큼의 가치를 내가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유명한 곳에 발도장을 찍고 그 앞에서 사진을 남긴다. 그리고 건축물을 보며 가기 전 공부했던 그것의 역사적 의의를 생각하면서 머릿속에 되새김질을 하고 내 지식으로 축적한다. 이게 바로 나의 여행 방식이다. 그래서 나 혼자 갔었던 이듬해 모스크바 3박 4일 여행에서는 볼쇼이 극장을 외부에서만 보고 굳이 들어가진 않았다. 아, 한 가지 예외가 있었다. 붉은 광장의 러시아 국립 역사박물관에 들어갔는데, 너무 추워서 시간 때우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들어갔다. 아무튼 이제 나는 극장 안으로 들어간다.



5층 좌측면 자리에서 바라본 마린스키 극장 공연장 
5층 좌측면 자리에서 바라본 마린스키 극장 좌석, 실로 그 규모가 엄청나다



  마린스키는 정말 어마 무시한 규모의 극장이었다. 1층부터 5층까지 전부 객석이다. 남은 현장표는 역시나 제일 좋지 않은 구석자리였는데, 5층이라 5등석이었으며 좌측에 치우친 자리였다. 문제는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계단으로 걸어서 여기까지 와야 했다는 것. 사람도 엄청 붐벼서 만에 하나 있을 소매치기에 유의하면서 자리에 착석했다. 공연 시작 전, 나는 공연보다 객석에 앉고 있다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내가 태어나서 정말 이렇게 크고 오래된 극장에서 발레를 볼 일이 얼마나 있을까? 이제 슬슬 공연 시간이 다가온다. 여전에 발레 공연 시작에는 관심 없고, 이 광경을 계속해서 내 두 눈에 담아 본다.


  르 파르크(Le Parc) 공연이 시작한다. 모두들 숨을 죽이고 막이 열리자 남녀 주인공이 나와 춤을 추는데 관객들은 그들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나도 처음에는 그랬다. 그런데, 대략적인 이 공연의 스토리도 모르고 오로지 Performer의 움직임만을 보고 공연을 즐겨야 했다. 한 20분 그래도 열심히 노력해본다. 하지만 안 되는 것은 안 된다. 그다음부터 눈이 풀리면서 도저히 집중이 안 된다. 사람들이 '오~'하면서 감탄사를 내뱉고 박수를 치는데, 왜 그런지 이해는 가지 않지만 그냥 따라서 행동했다. 유일하게 공연 중간중간에 쫄쫄이 옷을 입은 남자 4인방이 엄청 유연한 몸으로 웃긴 몸짓을 펼친 것이 기억난다. MG 투어 일행들은 이들의 움직임에 매료되어 발레 공연에 점점 빠지고, 최고의 공연이었다는 찬사를 보냈다. 발레에 맛을 알게 되었다며 카자흐스탄으로 돌아가 현지 공연까지 보기도 했다. 물론 나는 제외하고.


  이렇게 짧은 2박 3일 여행의 둘째 날이 저물어간다. 다행히 추가 소매치기 같은 별 일은 없었다. 다들 저물어가는 밤을 아쉬워하며 가는 길에 슈퍼에서 보드카 한 병을 더 사 가지고 숙소로 간다. 나는 여전히 발레가 싫다. 지금도 수 십만 원짜리 공연 공짜 티켓을 준다고 해도 거부할 것이다. 이렇듯 여행에서 단체 행동을 하는데, 싫은 것을 억지로 경험한다는 것. 썩 유쾌한 것은 아니었다. 싫은 티를 좀 내긴 했지만 역지사지로 생각해본다. 말이 좋아 MG 투어이지 내 투어 계획에 100% 만족했던 사람이 있을까? 아마도 아니겠지. 발레 공연을 봤기 때문에 마린스키 극장이란 곳도 알게 되고 인생에서 플러스가 될만한 경험을 했다고 생각해본다. 여행을 가서 남의 의견을 듣고 맞춰준다는 것. 비싼 돈을 들여 개인 만족 Max를 추구하는 게 여행이기 때문에 더 어려운 것 같다. 아쉽지만 그래도 하루가 남아 있다. 제정 러시아 말기 사치와 향락의 끝판왕을 볼 수 있는 예카테리나 궁전으로 가보자.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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