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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그니pogni Oct 19. 2020

외국에서 아리랑을 듣는다는 것은

Pongi, 유라시아 여행기 : 카자흐스탄 편 #12

KIMEP 교환학생 Life를 정리하기 위해서 판필로프 공원으로 갔다.


내 인생에는 목표도, 방향도, 목적도, 의미도 없다.
그런데도 나는 행복하다. 왜 그런 걸까? 나는 뭘 제대로 하고 있는 걸까?
찰스 슐츠 (Charles Schulz)


  하루하루는 길지만 어느덧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다녀와서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가 기말고사 기간이 다가오고 있다. 그 의미는 KIMEP 대학교 교환학생으로서 만난 친구들과의 시간도 종착점을 향해간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나는 글로벌 인턴십 프로그램으로써 이곳에 왔기 때문에 이후 반년은 한국무역보험공사(K-SURE) 알마티 사무소에서 학점 이수를 조건으로 인턴십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비록 다들 처음 만났을 때는 내성적인 친구도 있고 그래서 서로 간에 경계심도 있었지만, 타지에서 힘든 생활을 같이 이겨내면서 좋은 추억을 쌓았다. 일주일에 4일 이상은 누군가의 방에 모여 새벽이 되도록 술을 한 잔씩 하면서 도란도란 살아왔던 얘기, 이곳에서 겪었던 황당한 일 등을 공유하며 각자의 마음의 벽을 허물었다. (내 방에 항상 술이 쌓여 있어서 대부분은 내 방에서 모였다, 룸메이트한테는 미안하지만.) 처음에 왔을 때, 호스텔에 잠시 머물렀다가 페인트도 제대로 마르지 않고 라면 끓이려면 30분은 있어야 하는 안 좋은 인덕션이 있는 공용 주방을 쓰면서 과연 한 학기를 제대로 무탈하게 마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렇지만, 계절은 뜨거운 태양이 작렬하는 8월을 지나 언제가 끝인지 알 수 없는 12월에 다다랐다. 가끔 한국에서 각자의 부모님이 한국에서 택배를 보내주시면 이를 풀면서 같이 나눠 먹었던 기억, 삼겹살을 먹어보겠다고 질료니 바자르에서 갈비뼈와 지방이 통째로 붙어있던 고기를 칼질해서 버려가며 나눠 먹었던 기억 등. 벌써 6년이란 시간이 지났지만 당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다시 모인다면 하루 종일 밤새가며 이를 안주삼아 술을 마실 수 있을 만큼 말이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이렇게 다 모이는 게 쉽지 않았다. 지역적인 이유, 각자의 삶이 바쁜 이유 등으로. 내 결혼식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온전히 '14년 가을학기 KIMEP 교환학생 Family가 유일하게 모두 모였던 사건이 아닐까?






  수 십 cm의 눈이 내렸다가 겨울 햇살을 맞으며 녹고 있던 12월 어느 주말. 나와 동욱이, 가영이와 희재 4인방은 여러 가지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을 품은 상태로 학교와 가까운 알마티의 판필로프 공원으로 향했다.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딱히 없다. 그냥 한 발자국씩 앞으로 가다 보니 자연스레 자주 가던 길로 왔더니 여기였다. 걸어서 질료니 바자르를 가기 위해서는 늘 지나갔던 곳. 비둘기 먹이를 주고 있는 사람들에게 눈길이 가는 찰나, 갑자기한 거리의 노(老) 음악가가 우리를 불러 세운다.


"까레이스끼??? (한국인????)"
"다, 워 친 유즈노 까레이스끼 (맞아요, 남한 사람이에요)"


  그러더니 갑자기 그의 아코디언에서 우리나라 '아리랑' 노래 곡조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어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일순간 그의 아코디언 멜로디를 제외하고 정적(靜寂)이 흐른다. 너나 할 것 없이 그와 마주한 채로 오로지 아코디언 멜로디에만 집중한다. 그 순간 아리랑 멜로디는 우리 각자에게는 어떤 의미였을까? 거리의 음악가는 어떻게 아리랑 멜로디를 알고 있었을까? 머나먼 이국땅 카자흐스탄에서 듣는 아리랑 곡조는 신기함을 넘어 경이로웠고, 종국에는 구슬펐다. 나는 내가 처해진 상황보다 먼 옛날 영문도 모른 채 끌려와 평생을 척박한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땅에서 살다가 고국 땅 한 번 밟지도 못하고 어딘가에 묻혀 있을 고려인들이 생각났다. 그들이 화물열차에서 내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 위에 버려졌을 때, 밤이 되면 가족들을 부둥켜안고 울었으리라. 나는 힘들어도 비행기를 타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수라도 있다. 그들은 아무리 부르짖고 독립이 되어도 자신들이 갈구하지도 않았던 이데올로기 때문에 고국에 간다는 희망 자체가 없었을 것이라. 거리의 악사에겐 우리의 심금을 울려서 한 푼이라도 구걸받기 위한 도구였겠지만, 나에겐 그보다 훨씬 큰 의미였다. 이 멜로디는 고려인들의 한(恨)이 섞인 구슬픈 울음소리 같았다. 이역만리 땅에서 듣는 아리랑은 반갑지만 구슬펐다.



판필로프 공원에 있는 러시아 정교회 양식의 '젠코브 대성당'



  결국 거리의 음악가에는 100탱게란 돈이 나갔다. 하지만 아깝지 않았다. 이를 뒤로하고 발걸음을 재촉해서 도착한 판필로프 공원에 있는 러시아 정교회 젠코브 대성당. 이 성당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목조 건축물이라고 한다. 20세기 초반 알마티를 강타한 진도 10의 강진 속에서도 살아남았다고. 이러한 사실은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야 알았다. 알마티에 살았을 때는 그냥 러시아 정교회 성당이구나 싶었지만. 국민 대부분이 이슬람교를 믿는 카자흐스탄이지만, 소련의 오랜 지배를 받은 영향 때문에 러시아 정교를 믿는 국민들도 꽤 있다고. 오늘은 교환학생 생활 마지막을 정리하는 날이니까 왠지 성당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졌다.


  우리 네 명의 일행은 모두 종교는 없지만,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기도했다. 20대 중반 우리들은 사실 두려웠다. 카자흐스탄 생활이 지치긴 했지만, 한국으로 돌아가면 펼쳐질 처절한 취업난과 보이지 않는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나는 그보다 더 앞섰던 것은 친구들이 돌아가면 맞이할 인턴십 생활을 잘 끝낼 수 있을까란 생각. 물론 잘 헤쳐나갈 것이란 믿음은 있었지만, 기나긴 겨울 춥고 우중충한 도시의 분위기가 나를 집어삼켰던 것 같다. 그렇게 우리 네 사람의 마지막 알마티 시내 나들이는 끝났다. 기말고사를 치르면 드디어 바라고 바랐던 생애 첫 유럽여행이 시작된다. 어떤 일들이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잠시 카자흐스탄 밖을 벗어나 추웠지만 청춘 시절 가장 빛났던 순간으로 돌아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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