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퇴사합니다.

퇴사만 1,975일째 #1 : Prologue

by 포그니pogni



D-30
의문의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평소와 다를 것이 없던 어느 월요일 오후였다. 나는 AB산업 영업팀에서 직장생활 6년 차 대리로서 회사 인도 사업장을 관리하는 업무를 하고 있다. 그래서 하루에도 최소 10통 이상은 통화를 하는 것이 일이었다. 워낙 여기저기서 전화가 오다 보니까 이상한 번호다 싶으면 전화를 안 받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분명 모르는 지역번호로 시작되는 전화번호였지만 무조건 받아야 할 것만 같았다.



나 : 네, 여보세요??

상대방 : 포그니씨 맞으시죠? 여기 CD산업 인사팀입니다.

나 : 네, 잠시만요........ (10초 후) 말씀하시면 됩니다.

상대방 : 오래 기다리셨죠? CD산업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나 : .................!!!!!



나의 소원은 퇴사다. 드디어 그 꿈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얼마나 AB산업이 싫었냐고? 여길 다니는 매일매일 '언제 퇴사하지?'라고 하루를 시작하고, '퇴사하자'라면서 하루를 마쳤다. 퇴사하는 날에 '시원 섭섭'이란 단어에서 '섭섭'한 감정은 정말 단 1도 없었다. 그리고 퇴사한 지 한참이 됐지만, 종종 아직도 꿈에서는 "엄석대" 팀장한테 쌍욕을 먹고 있다. 맞다, 당신이 생각하는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악역 그 엄석대. 누군가의 위에 군림하면서 밑의 사람들을 하대하고 무시하고 깔보는 인간. 어떤 조직을 가든 그런 부류의 인간들은 있겠지만, 나의 엄석대는 그 이름을 내 입에 담기조차 싫은 인간 같지 않은 인간이었다. 입에 걸레를 물고 있어서 아침에 시X로 시작해 퇴근 무렵 시X로 끝나는 인간이자 쿨한 척 하지만 트리플 A형처럼 모든 걸 담아두고 직위를 이용해서 밑에 직원을 갈구는 사람. 갈구는 것에도 스킬이 있어서 회사가 떠나가라 소리치면서 갈군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마지막 떠날 때까지도 '취업 방해' 협박까지 했던 내 인생 최고의 쓰레기.


참... 엄석대가 내 퇴사 욕구 지분의 100을 차지했던 것은 아니다. AB산업에 있으면서 정말 거지 같은 인간들을 많이 만났다. 예를 들어, 역시 일단 욕은 기본 스킬로 장착하고 진급 안 시킨다고 협박했던 E 이사가 있다. 이 인간도 엄석대랑 비교하면 만만치 않다. 특히 쫌생이 기질이 다분한데, 그중에 하나로 그렇게 부려먹고 욕하고 하면서도 내 결혼식에 축의금도 내지 않은 인간이다. 그리고 B2B 기업이라서 영업팀은 고객사 구매팀과 일을 할 수밖에 없는데, 일단 기본적으로 갑질이 만연한 업계이다. 그중에서 제일 X 같았던 놈은 퇴사 직전까지도 괴롭히던 고객사 구매팀 J 과장까지. 카톡으로 사람 무시하는 것은 기본이며, 한국 시간 퇴근 직전에 무조건 노트북 가져가서 내가 전화하면 전화받고 일하라는 메시지도 아무렇지 않게 단톡방에 남기는 쓰레기. 무슨 일이 생기면 별것도 아닌 일 가지고 주말에 카톡 메시지를 계속 보내는 행위도 주특기다.


물론 이런 부류의 인간들이 내 퇴사 의지에 큰 기여를 했지만, 모든 것은 아니다. 연간 수 조 원의 매출을 올리는 지역 대기업이지만, 사무실 안에 들어오면 아직 쌍팔년도에 살고 있음을 체감한다. 그런 곳에 있다가 CD산업으로 이직하니 천지개벽이 된 느낌이다. 아침에 출근하는 데 있어서 부담감이 훨씬 덜하고, 스트레스받지 않으며 내 능력을 살릴 수 있는 업무까지 하고 있다. 이제 좀 사람이 사는 회사에 다니고 있는 듯하다. A부터 Z까지 단 한 가지도 AB산업의 좋은 점은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는 지금이다. 그곳에서 거지 같지만 인도를 20번 가까이 다니면서 해외 경험을 쌓거나 일이 너무 많아 자연스레 능력치가 오르긴 했지만, 그곳의 기억은 내게 트라우마만이 남았을 뿐.



그런데,
왜 1,975일이나 다녔냐고??



첫 번째 이유로 '나는 가장'이니까.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1년 정도 취업 준비할 자금을 모으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퇴사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본래 고향이 아닌 지방에 내려와 천생연분을 만났고, 불도저처럼 결혼을 사원 2년 차에 해버렸다. 가장이기 때문에 당장 무작정 퇴사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로는 나쁘지 않은 '연봉'이다. 연봉도 웬만한 대기업 평균 정도는 되는 수준이고, 이쪽 지방 주변에는 여기만큼 연봉을 맞춰주는 제조업체도 극소수였다. 게다가 매매로 집까지 사버렸으니, 내 운신의 폭은 좁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버텼고, 면접 보기 전에는 절까지 가서 공양까지 하며 기도를 하고 왔다. 제발, 여기 붙게 도와달라고.


그리고 붙었다. 대학교 합격 발표가 났을 때보다 훨씬 기뻤다. 그리고 엄석대 때문에 억지로 한 달이나 더 있다가 퇴사했는데, 막상 나가면서 속에 응어리졌던 것을 싹 다 말하고 가려고 하니 인간 아닌 인간들에게 말해서 뭐하나 싶었다. 그런데, 지금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그 응어리가 자꾸 가슴에 남아서 털지 않으니 자꾸 답답해서이다. 1년에 평균 100명 가까이를 신입사원으로 뽑는데 그중에 50명이 3년 안에 나간다면, 회사가 문제인 걸까? 아니면 MZ세대가 문제인 걸까? 나를 1,975일 동안 매일 퇴사하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앞으로 펼쳐질 나의 이야기를 듣고 불편하다면, 당신은 꼰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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