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만 1,975일째 #3
D-1,965
처음 팀으로 배치를 받았다
첫 주는 경주의 어느 호텔에서 신입사원 100여 명이 모여 합숙 교육을 받았다. 군대처럼 아침 6시에 기상해서 밖으로 나와 아침 점호를 하고 구보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는데, 이때 알았어야 했다. AB산업 기업문화는 '군대처럼'이 아니라 '그냥 군대'였다는 사실을. 아무튼 4박 5일간 합숙 교육을 받고, 마지막 금요일에는 본사 대강당에 가서 전 임직원들 앞에서 장기자랑을 실시했다. 군가처럼 사(社)가도 부르고, 네 가지 카테고리 중에 하나를 골라 장기자랑까지 펼쳤다. 뭐 여기까지는 'That's OK'이다. 장기자랑이 뭐라고 새벽까지 연습해가면서 준비했지만, 당시엔 그래도 취직했다는 기쁨이 더 컸으니까. 이렇게 준비하는 순간이 너무 즐거웠을 뿐이다. 그리고 그다음 주에는 본격적으로 팀으로 배치되기 전에 분야별 직무교육을 받았고, 목요일에 드디어 팀으로 배치가 됐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나는 처음부터 AB산업의 영업팀에 지원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팀이 아닌 본부별로 신입사원 모집을 했는데, 직무 요강에 '기획 본부'라고 되어 있길래 나는 당연히 경영기획팀에 배치받을 것으로 생각하고 왔다. 그리고 신입사원 합숙교육을 받으러 오자마자 명찰을 보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영업팀에 배치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물론 사기는 아닌 듯하다. 왜냐하면 영업팀이 기획 본부에 속해있는 팀이었으니까. 만약에 팀 단위로 모집요강이 되어 있었다면, 나는 '절대로' 영업팀에 지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젠장. 그런데 어떻게 지원자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렇게 회사 마음대로 팀 배치를 할 수가 있을까? 그저 황당할 뿐이었고, 돌이켜보면 쌍팔년도 문화가 만연한 곳이기 때문에 그냥 회사가 슈퍼 갑(甲)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일까? 영업팀에 배치된 것을 알게 되고 이 팀의 워라밸이 극악이란 것도 금세 알게 되었다. 그렇다, 여기서부터 꼬인 것이다. 만약 내뜻대로 기획팀에 갔으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자, 아침에 오면 청소부터 해야 합니다.
(feat. 30분 일찍 출근하는 이유)
나는 팀에 배치돼서 첫 출근을 하기 전까지 왜 8시가 아닌 7시 30분까지 출근해야 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어차피 통근버스가 7시 25분 즈음 도착하기 때문에 강제로 일찍 출근하긴 해야 하지만 말이다. 30분이 되면 회사 전체에 종이 울리는데,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서 빗자루를 드는 것이 아닌가! 정말 수 조 원의 매출이 발생하는 회사에서 빗자루 들고 사무실 청소라니 '놀랄 노'자였다. 일단 청소를 하긴 해야겠고, 뭘 해야 하는 것인지는 몰라 어리버리하고 있었는데 선배 사원이 다가온다. 오늘은 내가 할 테니 내일부터 쓰레기통 비우고 쓰레기봉투를 사내 쓰레기장에 갖다 버리라고. 그렇게 매일 아침 회사에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쓰레기통 비우기가 시작됐다.
팀장님, 공용 쓰레기통이
그렇게 멀리 있나요???
버릴 쓰레기가 많아서 보통 3명이서 쓰레기를 비우는데, 내 순번이 끝날 때까지 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일단 팀 공용 쓰레기통이 있다. 일반/재활용/폐지 이렇게 구분되어 있다. 어림짐작으로 30~40L 정도 되는 봉투의 크기. 그리고 사무실 곳곳에 자그마한 쓰레기통이 산재되어 있다. 크진 않은데, 그 작은 쓰레기통은 일반/재활용 구분이 안 되어 있어서 매일 아침 면장갑을 끼고 쓰레기가 있나 확인해보고 일일이 손으로 분리작업을 해야 한다. 참..... 다시 생각해봐도 꽤 높은 신입사원 초봉을 받으면서 아침에 30분 일찍 출근해서 하는 일이 쓰레기통 비우기라니, 그저 어이가 없을 따름이다. 그리고 팀장님, 공용 쓰레기통이 그렇게 멀리 있나요? 임원도 아니신데 혼자만의 쓰레기통을 쓰시면서 재활용품은 좀 공용 쓰레기통에 버려주시면 안 되나요? 그렇지 않아도 심심하면 쌍욕을 날려서 굴욕감을 안겨줬던 엄석대 팀장 얼굴을 매일 아침 보는 것도 짜증 나는 데, 그 인간쓰레기까지 대신 치워주고 있으니 울화통이 터지던 것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리고 이걸로 끝이 아니다. 사내 쓰레기장에 가면 재활용품을 다시 병, 캔, 플라스틱 등으로 직접 손으로 재분류해야 한다. 개념 없는 팀원 때문에 우유나 커피라도 쏟아져 있는 날이면? Wow, 한 번은 썩은 커피가 옷에 튀어서 하루 종일 냄새가 났던 적도 있다.
매출 수 조 원이나 하는 회사에서 이렇게 전 사무직(군대처럼 짬밥을 많이 드신 분들은 가만히 앉아 있는다)이 매일 아침 30분이나 일찍 출근해서 쓰레기를 치워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그놈의 '전통' 때문이다. 세상에! 어떤 큰 기업에서 전통이라는 명목으로 전 임직원이 아침마다 쓰레기를 치운다는 말인가. 아무리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지만 결코 유쾌한 기억은 아니다. 나중에는 쓰레기통을 벗어나서 사무실 外 구역 청소를 했는데, 맙소사...... 면장갑을 끼고 재떨이에 있는 담배꽁초를 버리고 휴게실 쓰레기통을 정리하는 것이 내 일이었다. 결국은 1,975일 동안 나는 쓰레기통을 벗어나지 못했다.
CD산업에서는 청소하는 아줌마가 있어 별도로 아침마다 청소하는 일은 없다. 아침에 쓰레기통을 비우지 않는 것만으로도 삶의 질이 달라진 기분이다. 2020년대에 정말 웃픈 일이 아닌가 싶다. 비정상이 정상으로 인식되어서 원래 정상적인 것을 누리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치 특혜를 받는 기분이라니. 뭐... 덕분에 감사할 줄 알게 되어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아무리 퇴사자가 면담에서 이에 대해 부당함을 제기하고, 익명 어플 블xxx에서 이슈화가 되어도 전통이라는 이름 아래 모든 것이 무마되었던 곳. 절은 바뀌지 않는다, 중이 떠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