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그니(Pogni), 유라시아 여행 - Ah! 챠른 협곡이여!
아직은 기숙사가 어수선하다. 이것저것 마트나 시장에서
구매를 해도 뭔가 모자라 보인다. 게다가 얼마나 페인트를
대충 발랐는지 침대 옆 벽면에 기대니 검은색 옷에 하얀색
페인트가 묻는다. 최악이다. 그래도 기숙사 입성한 덕분에
KIMEP 대학교의 현지 친구들과 많이 친해졌다. 이 대학은
중앙아시아 대학교이다. 카자흐스탄의 각 지방뿐만 아니라
키르기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 중앙아시아 각국에서 국가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하는 학생들도 많다. 또한 이 지역의
한국과 중국 학생도 많다. 많은 지역 사람이 모인 만큼이나
동아리도 많았는데 직접 가입한 교환학생도 꽤 됐다. 또한,
가입하지 않아도 같이 즐길 수 있는 동아리도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인 교내 여행 동아리를 통해서 갔던 곳이 카자흐
지역의 그랜드 캐년이라고 불리는 챠른 협곡이었다. 물정
모르는 교환학생들을 이용해 일부 돈을 동아리에서 떼먹는
것 같았지만, 사실 챠른 협곡은 현지인들을 통하지 않는 한
당시에는 가기 힘든 곳이었다. 가격은 5,000탱게 (3만 원)
였고, 이에 차량과 가이드 비용이 포함됐다. 아침 7시쯤이
출발 시각인데 이 금액에는 식비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드디어 출발하는 일요일 아침이다. 9월 경 알마티 시내
아침 공기는 꽤나 차갑다. 그런데 아침 7시에 출발하는
이유가 있다. 버스로 편도 3~4시간이 소요되는 아주 긴
여정이다. 게다가 챠른 협곡 근방으로 가면 비포장도로
길로 바뀌는데, 멀미가 날 정도로 버스 흔들림이 심하다.
왕복 8시간 가까이 버스를 타야 하고 추가로 트래킹까지
해야 하는 일정이기 때문에 무척 힘들다. 어쨌든 알마티
시내 밖으로 나가는 첫 여행이고 10명이 넘는 교환학생
친한 친구들도 함께 갔기 때문에 버스 안의 공기마저도
달콤했다. 아, 출발 후 30분 후 까지만 나는 즐거웠었다.
우리나라에서 축구 중계방송을 할 때 특징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예전에는 보통 캐스터와 해설 각 한 명씩
짝을 지어 주거니 받거니 방송을 했었다. 물론 요즘엔
특별 초빙 해설위원까지 포함 세 명이 하는 중계방송이
유행이긴 하다. 그렇지만, 외국에서 TV를 틀고 축구를
보고 있노라면 캐스터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말도 빨리
다 한다. 이 버스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 왕복 8시간
동안 운전수 옆에서 마이크를 잡고서 쉴 새 없이 떠드는
카작 현지 할배가 있었다. 게다가 자리는 2층의 스피커
바로 밑이었다. 라디오를 듣는 것과 같은 수준의 소음이
아니었다. 미치겠다. 피곤하지만 잠을 도저히 잘 수가
없었다. 언제쯤 끝이 날까??? 그런데 현지인들은 그저
너무 재밌다고 낄낄 웃는다. 아, 러시아어를 몰라서 난
재미없는 것일까??? 짜증 게이지가 최고치를 찍으려고
할 때 즈음 갑자기 버스가 휴게소 같은 곳에 멈춰 선다.
휴게소가 맞다. 그런데 우리나라 수준의 휴게소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래도 있을 건 다 있다. 매점,
화장실, 노점상 세 가지. 하지만, 이곳에서 난 두 가지
충격적인 경험을 했었다. 내 인생에서 다시는 경험치
못할 만큼의 그때 기억이 아직 내 오감을 간지럽힌다.
첫 번째는 화장실이다. 어렸을 적 외갓집과 군대 훈련장
기억 때문에 푸세식 화장실에 대해서 충분히 적응 완료
되었다고 생각했다. 먼저 화장실에 갔던 전우들이 뛰쳐
나오는 것을 보고도 난 과하게 반응한다고 생각을 했다.
그렇게 별생각 없이 그곳에 들어갔다. Ah..... 지구 최강
암모니아 냄새가 내 콧 속을 뚫은 후 뇌까지 파고들었다.
미쳤다. 단 몇 초만 참으면 되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 난
앞에 전우들처럼 패잔병이 되어 볼 일도 보지 못하고서
뛰쳐나왔다. 나는 남자인 게 다행이다. 안 보이는 곳에
가서 조용히 처리하고 오면 되니까. 여학생들은 도저히
안될 것 같으니 결국 챠른 협곡까지 버스 안에서 참았다.
두 번째는 노점상에서 파는 카자흐스탄 전통 과자였다.
하얗고 동그란 모양의 과자는 마치 하얀 설탕이 범벅된
초코 과자 같았다. 이 전통 과자 한 알에 무려 100탱게
(600원)씩이나 했다. 마치 휴게소에서 4,000원을 주고
먹는 차가운 핫바 같았다. 그렇지만, 전통 음식을 먹어
보는 것을 좋아하는 나였기에 스스럼없이 구매를 하고
바로 입 속으로 넣었다. "!!!!!!!!!!!!!!!!!!!!!!" 먹는 순간
느꼈던 오직 느낌표만으로 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Ah!
참고 먹어보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 이 과자의
주재료는 '말젖'이었다. 그랬구나. 그래서 이렇게 상한
맛이 났구나. 이 전통 과자를 옆에서 함께 구매를 했던
오스트리아 친구도 나와 거의 동시에 내뿜었다. 그리고
한동안 계속 헛구역질을 했다. 이제 마유주, 말젖 과자
두 가지는 내 카작 생활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그 후
다시 말 젖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다행이다.
마침내 버스는 챠른 협곡에 도착했다. 태어나서 처음
으로 보는 광경이다. 이육사 시인의 '광야'란 시(詩)가
암흑을 뚫고 바라던 광야의 모습이 지금 내 눈 앞에서
보이는 이 광경과 같지 않았을까? 나는 자연을 느끼는
여행의 즐거움을 몰랐다. 하지만 챠른 협곡 트래킹을
계기로 내 생각은 바뀌었다. 가이드를 따라서 입구로
들어간다. 카자흐스탄의 그랜드캐년이라고 불리는데
나는 그랜드 캐년이 어떻게 생겼는 지도 까마득했다.
지금 내가 느끼는 챠른 협곡은 '제2의 ㅇㅇ'이 아니라
제1의 챠른 협곡 그 자체였다. 이 황홀한 풍경에 취해
사진을 찍으면서 앞의 일행을 따라잡는 걸 반복했다.
그런데 9월임에도 불구하고 카작의 햇빛은 무척이나
뜨거웠다. 게다가 가는 길목에는 그늘도 없다. 트래킹
출발 후 1시간이 지나니까 덥고 지친다. 앉고 싶은데
가이드는 나를 기다리지 않는다. 터닝 포인트까지는
무조건 쉬지 않고 걸어가야 한다면서. 그리고 지나는
길목에는 이런 여행자의 마음을 아는지 돈 받고 말을
태워준다는 호객꾼이 즐비하다. 유치원생도 안 될 것
같은 아이부터 할아버지까지 온 가족이 호객 행위를
한다. 그렇지만 말을 타는 우리 일행은 없었고 참고서
꿋꿋하게 걸어간다. 얼마나 지났을까? 고지가 보인다.
그늘도 쉴 곳도 없는 사막과 같았던 협곡에 오아시스가
나타났다. 답답한 가슴을 뻥 뚫어주는 강줄기가 흐른다.
이곳이 터닝 포인트다. 이곳이 점심식사를 하는 장소다.
먼저 지불했던 5,000탱게 금액 안에 식비는 불포함이다.
그래서 나랑 같이 자주 붙어 다녔던 친구들과 합심하여
단체로 주먹밥을 만들어왔다. 그리고 텁텁하기 그지없는
배를 채우는 용도의 카작 빵도 마트에서 사 왔다. 더위와
트래킹 강도에 비하면 매우 빈약한 식단이다. 배고프다.
카자흐스탄에서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재밌게 즐겼는데
생각하면 늘 배고팠다. 배고프지 않던 적이 거의 없었다.
한편 이곳은 구글맵에 'Turn to Charyn Canyon'이라
표기되어 있기 때문에 나는 터닝 포인트라 불렀다. 대게
챠른 협곡 관광 코스는 여기까지 온 다음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이곳에서 가이드는 두 가지를 제안한다. 첫 번째
안은 강에서 쉬다가 돌아가는 것. 두 번째는 챠른 협곡의
절경을 볼 수 있는 높은 포인트를 가이드와 가는 것이다.
난 고민의 여지도 없이 바로 두 번째를 선택하고 가이드
출발 신호와 함께 쉬다 말고 따라갔다. 과연 어땠을까??
올라가는 길의 난이도가 생각보다 높다. 오르막 길과
내리막 길을 반복했는데 가이드가 유명 포토존에서는
잠시 사진 찍을 시간을 줬다. 그런데 챠른 협곡은 모래
바닥이기 때문에 길을 따라 오르고 내릴 때 항상 조심
또 조심해야 할 만큼 미끄러웠다. 특히 내리막 길에서
누군가 먼저 내려간 사람이 지지대가 되어 안 다치게
도와줬다. 위에서 바라본 풍경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인간의 힘으로 만든 '건축의 미(美)'
는 결코 따라올 수가 없는 자연이 만든 '미(美)'다. 난
일행들 중 가장 뒤편에 서서 앞서가는 사람들을 보며
자연 앞에 인간은 선도 아닌 하나의 점이란 것을 새삼
깨닫는다. 그렇지만 신발 안에 많은 모레가 쌓일 만큼
험난한 오프로드였다. 챠른 협곡 입장하고 3시간 정도
지난 후 강에서 놀고 있던 인원들과 합세해서 버스가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모두 몸은 녹초가 됐지만
표정에는 뿌듯함이 묻어있었다. 이후 지금까지 나는
수많은 나라와 도시를 여행했다. 그렇지만 챠른 협곡
에서 느꼈던 웅장한 광야에 견줄만한 장소는 없었다.
카자흐스탄에 여유로운 일정을 가지고 여행을 한다면
챠른 협곡은 반드시 방문해야 할 곳이다. 그렇게 다시
4시간을 시끄러운 2층 버스 스피커 밑 같은 자리에서
고통 받다 알마티 시내로 돌아왔다. 모두 힘들었는지
버스에서 내린 후 표정이 지쳐있다. 나도 바로 누워서
잘 수 있었지만 허기가 잠을 이겼다. 학교 근처 케밥
레스토랑에서 맥주를 반주 삼으면서 하루를 마쳤다.
이 날 얼마나 깊이 잤는지 다음날 수업을 제쳐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