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그니(Pogni), 유라시아 여행 - 기숙사는 지옥이다!
어느덧 카자흐스탄에 입성한 지 한 달이 가까이 됐다.
그 사이에 호스텔 II에서 호스텔 I으로 이사도 했었다.
개강하고 일주일 내에 끝난다고 했던 KIMEP 대학교
기숙사 리모델링 공사가 드디어 끝났다. 마침내 정착
할 수 있는 곳으로 이사를 가는 것이다. 카자흐스탄의
사람들은 정말 느긋하다. 시간을 지키는 법이 없었고
모든 것이 느렸다. 학교 행정절차를 포함해서 말이다.
호스텔 도미토리에서 6인 혹은 8인 1실로 한 달 동안
사는 것은 정말 불편했다. 특히 여자인 친구들이 많이
불편해서 4번, 5번 항의를 한 후에야 기숙사가 아니라
미국인 교수들이 거주하는 게스트 하우스에 입성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거기서도 네 명 정도가 들어갈 법한
한 방에서 여덟 명이 일주일 동안 화장실 하나를 함께
쓰면서 살았다고 한다. 우리가 이렇게 KIMEP 대학교
기숙사에 집착했던 이유는 단 하나다. 바로 돈 문제!!!
학교 측의 사유로 기숙사에 들어가지 못했음에도 불구
하고 한 달 동안 호스텔 살이를 하면서 청구된 숙박비
전액은 교환학생 본인이 지불했다. 그래서 2주일 간은
재밌게 지냈지만 그 이후부터는 매일 쌓이는 숙박비와
느릿했던 학교 행정절차에 화가 축적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KIMEP 대학교에서 교환학생의 학교 행정 절차를
담당했던 율리아(Yulia)란 사람은 항상 화난 표정으로
말도 어이없게끔 자주 해서 아직도 기억하는 이름이다.
그리고 교내 게스트하우스에 머물던 여학우들이 먼저
기숙사에 입성하고 그다음은 남자들 차례였다. 마침내
수업이 끝나고 기숙사로 옮긴다는 생각에 꽤 설레었다.
나는 고등학교 3년 동안 기숙사에 살았었다. 6인 1실을
사용했기 때문에 2인 1실이라는 말을 듣고 너무 좋았다.
그렇지만 실상은 4인 1실이었지. 큰 입구 하나가 있고,
거기에 2인 1실 방이 두 개가 있었다. 그리고 네 명이서
화장실 하나를 나눠 썼다. 남자 네 명이 화장실 하나를
쓴다는 것은 교환학생 기간 내내 큰 고통이었다. 특히나
뱃속에서 천둥소리가 동시에 날 때면 아주 지옥이었다...
이제 기숙사로 가보자. Oh, My God~!!! 남자 교환학생
구역은 4층이었다. 카자흐스탄에 입국 시 30kg~35kg
무게의 짐을 가져왔고, 호스텔에서 살았을 때도 필요한
물품을 이것저것 많이 사서 짐이 한 무더기였다. 게다가
엘리베이터가 고장이었다. 모든 나의 짐을 호스텔에서
기숙사까지 옮기는 것도 일이었다. 걸어서 왕복 20분이
넘는 길을 최소 세 번은 왔다 갔다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기숙사에 도착 후 4층까지 올라가는 계단이 고역이었다.
호스텔에 살 때는 기숙사에 입성하면 행복한 일만
있을 줄 알았다. 그렇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진짜로
지옥이 시작됐다. '구관이 명관이다.' 이런 상황에서
쓰는 말은 아니지만 돌이켜보면 호스텔에서의 삶이
그렇게 그리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일단 아무것도
없었다. 오로지 책상과 의자, 침대, 침구류 뿐이었다.
심지어 샤워기 호스에서는 물도 안 나왔다. 그래서
호스를 분리해서 무릎 높이의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로 샤워를 하기 위해서 모든 걸 포기하고 바닥에
앉아서 한동안 샤워를 했다. 또한 공동 부엌을 사용
했는데 가스가 아니라 인덕션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인덕션의 불편함을 깨달았다. 최고로 강하게 파워를
올려도 라면을 끓이는데 최소 20분은 걸렸다. 만약
공동으로 큰 냄비에 뭐라도 해 먹는 날에는 1시간은
최소로 잡고 저녁 준비를 해야 했다. 물도 사 먹어야
했는데, 학교 기숙사에서 가장 가까웠던 마트까지는
걸어서 20분가량 소요됐다. 바로 옆 방에 있었던 한
명이 물 먹는 하마였는데, 어쩔 때엔 물 먹지 말라고
엄청 뭐라 하기도 했다. 기숙사는 지옥이다. 지옥....
그런데 진짜 문제는 끼니 해결이었다. 윗 문단에서
언급했듯이 불편한 인덕션으로 인하여 빠른 속도로
밥을 먹을 수 없었다. 그래서 기숙사 입성 후에 나는
부모님께 연락해서 최대한 빨리 미니 밥솥 등 필요
물품을 국제 택배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한국에서
카자흐까지 약 2주의 배송 시간이 걸렸는데 그동안
현지 식당에서 한 끼에 최대 500 탱게란 (3,000원)
최대 지불 용의 금액을 설정하고 최소한으로 끼니를
때웠다. 그리고 미니 밥솥과 함께 라면, 고추장 등이
같이 왔다. 대부분 밥을 해서 고추장에 비벼서 김과
함께 먹거나 밥솥에 라면을 끓여서 먹었다. 다행히도
카작에서는 한국 라면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천 원
조금 넘는 가격에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귀중했던
라면. 그때는 정말 매일 라면이나 고추장 밥을 먹는
것이 싫었다. 한 번은 너무 물려서 속에서 올라왔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열악한 환경에서 친구들과
콩 하나라도 나눠 먹었던 것조차 즐거웠던 추억이다.
이렇게 지옥 같았었던 기숙사에서 그래도 우리들은
재미를 찾아갔다. WI-FI 역시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살만큼 자주 끊기고 느렸다. 그런데 놀랍게 이 곳에
올 때 공유기와 LAN선을 가져왔던 친구가 있었는데
노트북에 선을 연결해서 스타크래프트 팀플을 했다.
미친 듯이 재밌었다. 우리 중에 스타를 잘했던 친구는
전혀 없었다. 역시 못하는 사람끼리 붙어야 불붙는다.
가끔 인원이 안 맞아서 프로토스를 선택 포톤 캐논만
지을 줄 아는 여학우도 불렀었다. 그리고 깊은 밤이
어느새 스며들면 거대한 내 캐리어를 식탁 삼아 안주
없이 술을 즐겼다. 해외 어느 곳에서나 소주는 귀하고
비싸기 때문에 나는 주로 맥주와 보드카를 즐겼었다.
한국 대비해 무척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었다. 또한,
음주를 사랑하는 나는 가끔 저녁을 안 먹고 고급 안주
가령 연어를 사 와 혼술도 즐겼다. 기숙사는 지옥이다.
지옥이지만 좋은 사람들을 만나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었다. 말도 안 되게 열악한 환경 때문에 가끔씩은
욕이 절로 나오기도 했지만 그래도 좋지 아니한가!!!!
결혼한 후에는 당시 추억을 나눴던 친구들과 연락을
자주 하지 않는다. 또한 다시 생각해본다면 유치했던
다툼 때문에 연락이 소홀하게 된 사람도 있다. 가끔은
만나서 회포를 풀고 싶지만 각자 살아가는 것이 바빠
어쩔 수 없지만 다시 만나면 2014년으로 돌아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