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의 기억을 담다_02
갑자기 밖에서 화장실이 가고 싶어 질 때의 소름 돋는 느낌을 아시나요?
남자 친구와 사귀게 된 지 세 달 정도 된, 얼마 안 되었던, 겨울치고 따수운 날이었습니다.
남자 친구는 요리하는 걸 매우 좋아했고, 그에 비해 저는 편식을 하니 해주고 싶어도 적당히 해 줄 만한 요리가 없다며 아쉬워했었습니다.
그러다 운 좋게 남자 친구의 바람을 들어줄 일이 생겼습니다. 겨울이니 매일같이 춥다가 주말의 날씨가 좋아 서울숲에 가서 도시락을 먹고, 실내로 들어가기로 했었지요.
만나기로 한 전날 저녁, 그는 도시락에 뭘 싸올까 곰곰이 고민을 하다 맛살 유부초밥과 새우튀김, 여러 과일과 고구마 맛탕을 해오기로 했다며 요리를 먹게 될 저보다 더 설레발을 치더군요.
귀찮은 유부초밥과 튀김, 상큼한 여러 과일에 달콤한 맛탕까지…. 정말 고마웠지만 그 날의 메뉴 중 맛탕 말고는 그다지 제 흥미를 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메뉴가 맘에 안 든다고 말을 할까요. 그냥 너무 기대돼서 잠도 못 자겠다며 좋아하는 척했지요, 그래도 그중 맛탕의 양이 가장 적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맛탕이 가장 기대된다고 말하는 건 빼놓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서울숲에 도착해, 제가 아닌, 남자 친구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도시락을 먹을 타이밍이 되었습니다. 날씨도 가을처럼 따듯하고 포근해 맛탕이 아닌 다른 메뉴들도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옆에서 도시락을 세팅하며, 맛있게 먹을 제 모습을 기대하고 있는 그를 보고 있으니 따스워진 마음이 더욱더 기분 좋게 만들었습니다.
드디어 요리들을 먹을 때가 되었습니다. 그는 맛탕이 가장 기대된다는 말이 신경 쓰였는지, 손만 한 크기의 도시락 세 개의 통에 맛탕의 비율을 전체 음식의 70퍼센트나 되도록 많이 만들어왔습니다. 그 당시에는 다른 음식이 그렇게도 맘에 안 들었나 봅니다. 저는 그것을 보고 마음이 편안 해져 다른 음식은 적당히 먹고 맛탕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역시 맛탕은 달달하니 편식을 하는 저에게 안성맞춤이었습니다. 하지만 맛탕의 양이 너무나 많았을까요….
많다는 생각도 못할 만큼 입맛에 딱 맞아 중독된 듯 계속 뱃속에 밀어 넣었고, 옆에서는 흐뭇하게 보느라고 그렇게나 많이 먹는 저를 말리지도 않았습니다.
무엇이든지 많이 먹으면 탈이 나는 법이죠. 그 많은 맛탕을 다 먹고 나서야 무언가가 잘 못 되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고생한 남자 친구를 칭찬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뱃속이 뜨겁게 찰랑하며 아릿아릿 저려왔습니다.
제가 마냥 솔직하지만은 않다는 건 메뉴에 대해 별말을 안 한 것에서도 아시겠죠. 하지만 어떻게 마냥 솔직하다 해서 사귄 지 세 달 도 안 된 남자 친구에게 설사가 마렵다고 말을 쉽게 할 수 있을까요…? 그것도 남자 친구가 해준 도시락을 먹고요….
입맛처럼 장이 예민한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그였지만, 그다지 말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그 게 마렵다는 말을 하지 않고도 무사히 화장실에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온 머릿속을 뒤덮었습니다.
결국 저는 토할 것 같다며 그에게 여기서 가장 가까운 화장실을 가자고 했습니다. 너무 많이 급하게 먹어서 체한 것 같다면서요. 역시 잘 먹다가 갑자기 토할 것 같다고 하니 남자 친구는 믿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정말 토하기 직전의 입을 틀어막는 액션까지 취하며 온 진심을 다해 토할 것 같은 연기를 했습니다. 그러니 믿어 주더군요, 아니 믿어주는 척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척이든 뭐든 저에게 중요한 건 화장실이었습니다. 그저 경직된 몸의 움직임을 최소화하고 화장실을 찾을 뿐이었습니다. 걸어서 15분 거리의 역 화장실이었습니다.
찬찬히 다리를 움직이며 걸어갔습니다. 중간중간, 한계가 오는 듯하면 멈춰 서야 했습니다. 고비에는 쭈그려 앉기도 서슴지 않아야 했습니다.
그는 괜찮다며 저를 달래주었고, 결국 더 이상 큰 일을 내지 않고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그는 왠지 모르게 웃음을 숨기는 듯 보였습니다. 큰 일은 저 모르게 다른 모양으로 났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