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나는 상황에도 나는 무엇을 위해 열심인가
요즘의 나는 어느 마케팅 회사의 대리쯤으로 일하고 있다. 시험이 끝나자마자 경남교육 박람회 준비 때문에 정신이 없다.
다음 주 목~토에 있을 박람회의 목적은 도내 교육 성과의 공유라는데, 대체 교육의 성과라는 게 전시가 가능한 종류인지, 공유해서 뭘 어쩌자는 건지(아이고 열심히 하셨네요, 우리도 해봐야겠네요 이런 걸 원하는 걸까?)
현수막을 만들고, 품의 올려 물품 사고 귤 사고, 전시 보드 열 개 뚝딱, 사이사이 공문 처리, 다시 박람회 준비....
어제는 행정실에서 무슨 용도로 귤을 사느냐 물었다.
교장 선생님이 부스 오시는 분들 나눠드리게 사라 하셨다 대답하고 통화는 짧게 끝났다.
귤을 열 박스나 사면서 '물품비'로 올렸으니 세목이 맞지 않아 확인하셨을 거라고, 알지만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나쁜 기분을 오래 들여다볼 새도 없었다,
수업도 다 째고 눈 빠지게 모니터만 보고 있었으니까.
진짜 화나는 일은 오늘 퇴근 무렵이었다.
J선생님이 내 자리에 잠깐 왔다가 몇몇 반 아이들이 시국선언문을 쓰고 있다고, 혹시 그 반 수업을 가거든 출석체크만 하고 나오시라고, 학년부에서도 그렇게 얘기 나눴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언뜻 이게 무슨 말인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에 치여 일상 대화를 못할 지경인가 했으나,
정치적 중립이어야 하는 나의 위치를 망각한 탓이었다.
그러니까 교사는 교실에서
아이들의 시국선언문 쓰기를 도와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선언문 쓰는 아이들 옆에서 일절 의견을 보태서는 안 된다. 국어선생님이니 틀림없이 아이들이 봐달라 할 것인데 그조차 정치적 행위가 되어 징계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작년에 정치적 발언으로 징계를 받으셨던 선생님이 옆 교무실에 계신다. 어떤 발언이었는지 올해 이 학교로 옮겨온 나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지금의 정치가 교사의 중립을 논하기에 적절한 상황인가? 교사가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정말 학생을 위한 일인가? 누구를 위한 일인가.
교사에게 정치적 발언권이 없어서 이 모양이다.
교사인지 회사원인지 구분 안 갈 정도로 수업과 한참 동떨어진 업무들을 안고 살면서, 이십 년 전과 똑같은 급여를 받으면서, 헌신과 희생을 당연한 덕목으로 강요받으면서 산다.
교육청과 학부모와 학생들, 그 누구도 교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당연히 교사가 두려움의 대상이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두려워해야 하지 않나.
국민을 두려워해야 하니까, 교사도 국민이니까.
정치인들이 두려워하지 않는 국민은 국민이 아니고,
그래서 교사는 대한민국에서 무시받는 존재다.
무시하지 말자, 존중하자, 인격적으로 대하자 라는
구호를 외쳐야 하는 사람들이다.
정치인들은 선거운동 할 때 거리에도 나가고 시장에도 가고 미용실 파마하는 사람에게도 한 명 한 명 명함을 내밀지만, 학교는 가지 않는다.
교사를 위한 정책을 내겠다는 정치인은 아무도 없다.
학교에 오는 사람들은 실적을 올려야하는 보험사나 은행사의 신규직원들 뿐이다.
교사들은 목소리가 없는 사람들이다.
대신 목소리를 내 줄 사람도 없다.
아이들은 교실에서 시국 선언문을 쓰고
나는 교무실에서 교육 성과를 홍보할 보드를 만든다.
내가 할 일은 이게 아니라면서 나는 어쩌자고 그렇게 열심히 하는가.
그게 문제다.
그게 화가 난다.
올해 학교 교육과정과 관련한 자료를 취합해 보니,
아니 선생님들 해도 해도, 너무 열심히들 하신 거다.
도대체 이게 한 학교에서, 일 년에 다 가능한 일들입니까.
그러니 나는 샘들의 고생이 아까워서, 하나라도 빠뜨릴까 봐, 어떻게든지 가독성을 높여보려고 손목에 굳은살이 잡힐 정도로 마우스만 잡고 있는 것이다.
시국선언문을 쓰는 아이들 옆에 가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열심히 사는데 화가 난다.
교사로 살면서, 교사로 일하지 않는 나에게 화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