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이들이 나의 인정이를 키웠다.

서로를 응시하는 힘

by 다정한 시옷

2014년 2월에 첫 아이를 낳았다.

그 해 봄은 잔인하고 무도해서 백일이 채 되지 않은 아이를 품에 안고 무시로 울었던 기억이 난다.

뉴스에서 고개를 돌리면 이름만 불러도 이 없는 잇몸으로 웃어주는 아이가 있었다. 염치 없게 내 세상은 무사했다.

잘 먹고 잘 자는 것만으로도 존재가 이렇게 예쁠 수 있구나. 아니, 안 먹고 안 자서 속을 터지게 해도 소중한 존재일 수 있구나.


혹시 나도 소중한 사람일까.

이제 다 큰 어른이라 우쭈쭈하고 예뻐해 줄 사람이 없다해도.

아이를 보며 막연하고 어렴풋하게나마 그런 생각을 했다.


17년에 둘째, 19년에 막내딸을 낳고 인정이는 성숙 단계에 도달했다.

아들을 키울 때보다 딸을 키울 때 나와 좀더 동일시 되는 경향이 있는데, 어린 시절을 비교하며 외모와 성격, 습관 하나하나 다 비교곤 했다.

딸은 나를 닮아 활짝 웃을 때마다 잇몸을 환하게 인다. 그게 예뻤다. 이효리가 웃을 때는 예쁘다 생각한 적이 없는데 딸은 예뻤다.

그렇다고 울 때는 안 예느냐.

일부러 울릴 정도로 우는 것도 예뻤다, 뼈가 녹는 느낌이 뭔지 알겠다 싶을 정도로.

나도 제 감정에 솔직한 모습 그대로 사랑스러웠을까.

마흔의 내가 다섯 살의 나를 보며 자주 물었다.

육아서에서 가르쳐 주는대로아이의 감정을 읽어주려 노력하는 동안 내 감정도 이해했다. 괜찮아, 고마워, 미안해 하는 말은 내 입으로부터 나왔지만 듣는 사람 역시 나였다. 내가 가장 듣고 싶던 말이었으니, 내뱉는 순간 내가 평화로웠다.

아이도 금방 울음을 그치곤 했다.


물론 힘들었던 순간이야 말해 무엇하겠냐만,

내 인생의 힘듦이 육아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나만 힘들었던 것도 아니고

내내 힘들기만 한 것도 아니니 그건 논외로 하자.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화가 덜 나는 사람이 됐다. 원래 화가 없는 편이었느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았다. 내 아이가 없던 시절에 십대의 아이들을 매일 보며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 화나는 일 투성이였다. 수업 시간에 왜 그렇게 무기력한지, 싸가지가 왜 바가지인지.

그러나 육아 휴직을 끝내고 다시 십 대의 아이들을 만났을 때 내 마인드는 달랐다. 육아 때문인지, 세월호 때문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십대 아이들에게 뿐 아니라 나에 대해서도 화가 덜 났다.

잘난 사람과 비교하는 일도 덜 했다.

(아예 안 한 것은 아니란 말이다.)

공부를 좀 못해도, 말이 좀 거칠어도, 심지어 강약약강의 태도로 빌런이 된 놈이라 하더라도. 인격의 미성숙함이자 존재의 불완성을 보여주는 증거일 뿐, 그 아이는 누군가에게 귀한 존재는 걸 생각했다.

우리의 인연이 불운히 짧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건도 잊을만 하면 터졌므로 살아 있으니 생각했다.

살아만 있으면 언제든,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달라질 수도 있다.


육아로 나를 인정할 수 있게 되다니 운이 좋았다.

정말 운이 따랐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공을 운으로만 돌리는 것은 나의 내면 힘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니까 한번 다르게 생각 보자.

아이에게 향하던 사랑스러운 시선을 나에게로 돌릴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왜'라고 묻지 않았다.

많은 양육자들이 잊고 살았던 어린 시절의 결핍이 육아의 과정에서 떠올라 분노와 서운함, 원망의 감정에 힘들어한다.

왜 나는, 왜 엄마는, 왜 그때는, 왜 하필.....

그러나 지나간 일에 답을 구할 수 없다.

답을 구한다한들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이다.

이유를 반드시 따져 물어야 할 때는 있어야 할 존재가 갑자기 사라져 버리는 때다. 아무런 맥락 없이, 게다가 잘못의 책임자가 있다면 끝까지 파고들어 이유를 캐야 한다.

하지만 있어야 할 존재가 그 자리에 무사히 있다면

'왜'로 시작하지 말아야 한다. 존재하는 것만으로 고마운 일이다. 아이가 그러하듯, 나도 당신도 그렇다.

대신에 '내가 너라면, 네가 나라면'하고 서로의 시절을 가만히 응시할 수 있다.

아무런 판단 없이 그 순간의 서로에게 집중하는 일은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직면하는 방법 중 하나다.


다섯 살의 내가 마흔 살의 나에게 대답하는 말 지 않아도 이젠 알 수 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