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어려워서 좋은 것

글쓰기 주제로 넘나 어려운 것.

by 다정한 시옷

글쓰기의 주제를 받아 들고 어려운 것이 뭐가 있는지부터 찾아본다.

허리 디스크 낫기, 수업 준비, 엄마랑 잘 지내기, 뱃살 빼기, 재테크, 꾸준히 읽고 쓰기, 운전, 두피까지 깨끗하게 씻으며 긴 머리 유지하기, 커피 끊기, 주말 아침에 아이들 밥 챙기기, 유치원 준비물 안 까먹기, 보험 청구, 하루에 한 번 개 산책시키기, 숨 참지 말고 내뱉기.

정말로 의식하지 않으면 숨 쉬는 것도 제대로 못할 때가 많은데 어느 것 하나 어려워서 좋을 만한 게 없다.

글쓰기 주제 누가 생각한 거야, 대체?

'어려워서 좋은 것은, 없다'.

내가 내 발등을 찍었다.


겨우 떠올려보는 일화 하나,

학교에서.


수업 중에 아이들이 '어려워요'라고 말하는 순간을 좋아한다. 스스로 변태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말이 좋다.

소설을 함께 읽고 몇 가지 생각거리를 제시한 뒤, 토론하는 방식으로 수업을 했다. 토론이란 게 여덟 개의 반마다 똑같은 한 두줄의 문장을 답이라고 정리해 줄 수가 없에,

'오늘의 수업을 이해했다면 너의 언어로 표현하고, 피드백이 궁금하면 언제든지 나에게 물어보라'라고 안내할 뿐이다.

입시교육의 한가운데 서 있는 아이들에게 정해진 답이 없는 것만큼 난감한 일이 없거늘, 그 난감함을 내가 줬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 답이 없을 순 없. 하지만 자신의 언어로 생각을 표현하는 일이 낯선 아이들에게는 '노답'의 상황인 셈이다.

어렵다고 말하는 아이에게,

"그래? 생각이 필요해서 그래. 진짜 좋은데? 생각한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거든."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해할 것 같지 않아서 속으로만 생각한다.(그 아이는 내가 저를 멕인다고 생각할지도.)

아이들에게 좋은 일이란, 1등급 혹은 원하는 등급을 받는 일이다. 기준에서 나의 좋음은 아이들의 좋음과 다를 수밖에 없다.


겨우 떠올려보는 일화 둘,

집에서.


요즘 우리 집 어린이들의 독서 교육을 위해 '보물찾기 프로젝트' 중이다. 책 사이사이에 영화 보기, 공부 1회 면제권, 아이스크림 먹기 등등이 적힌 쪽지를 끼워놓았다.

작은 크기의 포스트잇(보물)을 제본 안쪽 면에 단단히 붙여두었으므로, 책을 훑어보기만 하면 절대 찾을 수 없다.

보물찾기 첫째 날, 가장 책을 안 읽는 막내가 벌써 세 개나 찾았다. 얇은 영어책에 중점적으로 끼워 뒀는데 여시 같은 딸내미라 눈치가 빠르다.

반면에 곰탱이 같은 우리 둘째는 어휴, 평소에 엄마가 읽자고 권했던 책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할 눈치가 1도 없다. 빨리 읽기 좋은 그림책만 슥슥 넘기고 있다. 그러다가 막내 보물만 한 개 더 찾았다.

"그러니까 네 꺼는 그림책에 없다고, 똥볶이 할멈쯤은 읽으라고, 야이, 곰탱아!"(내뱉진 않고 속으로만)

결국 둘째가 운다.

또 운다.

아무리 읽어도 자기 보물 찾기는 너무 어렵다고 짜증을 내며 울다가, 결국 아빠한테 혼나기까지 했다.

보물이 쉽게 찾아진다는 건 그만큼 아이가 책에 폭삭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는단 얘기, 그러나 그 정도의 독서력이라면 무엇하러 굳이 프로젝트까지 하겠냐고?

어디에 있을지 모르는 보물을 찾아 한 권, 한 권 읽어나가는 일은 확실히 아홉살이에게 어렵다. 어렵다 못해 가혹하다.

그러나 마흔 두살 엄마에게 보물 찾기란 쉬우면 안 되는 것,

더군다나 책 읽기란 마땅히 어려워야 한다.


쉬우면 무엇이 좋을까?

책 읽기를 예로 들자면, 책 읽기가 쉽다고 특별히 더 많이 읽는 것은 아니다. 읽기에 노력이 덜 든다고 특별히 다른 보상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남에게 자랑할 일도 아니고, 쉽게 읽혀야만 재밌는 이야기인 것도 아니다.

쉬우면, 그냥 쉬운 것이다.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로 넘어 일만 남는다.

그러나 어려울 때 우리는 그 순간에 머무른다.

책을 읽다 어려우면 앞뒤 문장을 곰곰이 되새기며, 이해 못 하는 중인 나 자신을 자각한다.

아홉살이는 보물 찾기가 어려울수록 책 고르기에 신중을 더한다. 엄마가 어떤 책을 권했는지 떠올리고, 내가 읽고 싶은 책과 불일치하는 지점에서 잠시 머뭇거리기도 한다. 우리집 보물찾기는 책 읽(히)기를 위한 단순한 프로젝트가 아니다. 지금이 아니면 해보지 못할 아이와 나의 추억이다.

다이어트가 쉽다고 여러 번 살 찌울 필요는 없고,

아이 키우는 게 쉽다 한들 여럿 낳을 수 없다.

어려워서 우리는 그 순간에, 과정 속에 머무르며 일상을 영위한다. 지나 보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세월을 충실히 자각하며 통과한다.

사실 처음부터 쉽고 어려움은 좋고 나쁨을 구분할 수 없다.

사람들은 기쁨을 긍정으로, 슬픔을 부정적으로 여기지만

감정이란 좋고 나쁨 없이 그냥 '일어나는 것'다. 이를 두고 정신과 의사 정우열은 '모든 감정에는 우열이 없고, 불필요한 것도 없다'고 하기도 했다.

종종 문제적 상황에서 한 발짝 떨어진 제삼자에겐 '좋음'이 보여도, 어려움을 통과 중인 당사자에게는 그것이 보이지 않거나 체감되지 않기도 한다.

어쩌면 신이 있어서 우리 인생의 그 모든 좋음을 혼자서만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도 커피를 두 잔 째 마신다.

커피 끊기는 어려워서 좋다.

쉬우면 이 향긋하게 맛난 커피를 내가 안 먹고 있을 것 아닌가!

어려워서 감사하다.

진심로.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