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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시옷 Feb 29. 2024

우리끼리 미안해하지 말아요.

'다가오는 말들', 은유

부산에서 양산으로 오는 지하철 안이었다.

화명역에선가 할머니가 손녀를 태운 유모차와 함께 탔다. 아이는 네 살쯤 되어 보였고 단발머리에 분홍원피스를 입었으며 '너무 더워' 하고 야무지게 표현할 줄 알았다. 유치원 진급식에 가 있을 나의 꿀떡이가 아른아른했다.

그리고 할머니는 손녀가 차창 밖을 보는 동안 손녀 한 번, 바깥 한 번 보고 있지만 손녀 얼굴 보는 시간이 더 길다.

애초에 목적 있어 지하철을 탄 게 아니라 양육의 시간을 수월히 버텨보려 나선 여행길이라고, 아이 손에 쥐어진 일회용 우대권이 말하고 있었다. 내 아이들 그 맘때 우리 엄마도 항상 버스를 탔다. 마을버스도 타고 시내버스도 타고 가끔 지하철 타고.


대각선으로 앉아 있던 할머니가 목소리를 냈다. 지하철 안내방송이 나오면 쉽게 묻힐 만한 작은 소리였지만 나는 들었다.

나는 아(애) 보는 걸 못하겠더라. 아 안 봐준다고 며느리랑 마음이 상했어..

바로 옆자리 앉아계신 할머니께서 무어라 한 마디 반응 하실법한데 조용하셨다. 두 정거장쯤 지나 옆자리 할머니가 자연스레 내리시는 걸 보니 아, 서로 모르는 사이! 목소리 할머니의 혼잣말이셨구나..

목소리 할머니는 가끔 유모차 쪽을 흘깃거렸다. 쓸쓸하고 기운 없고 딱딱한 얼굴이었다.


들어주는 이가 있었다면 무슨 말이 더 하고 싶으셨을까.

애를 못 봐주는 미안함일까, 연로한 육체에 수고를 얹으려는 자식들에 대한 원망스러움일까, 나는 왜 저 할머니처럼 손주 봐주는 게 어려운지 자책하는 마음일까.

아니면 내가 감히 짐작 못할 무게의 마음일까.

대체 손주 안 봐주는 할머니는 왜 죄책감을 가져야 하나?

할아버지들이 상대적으로 죄책감에서 자유로운 건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양육의 서사에 왜 아버지들은 없냐고)

손주 봐주시는 할머니의 노동은 어디에서 인정받나?

(할머니들 사이에서 조손 양육은 종종 '못할 짓'으로 폄하되며 '자식에게'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는 노년의 표본으로 언급된다)

할머니들 옆에 내 눈에만 보이는 며느리와 딸들도 탔다.

나 대신 희생할 사람 찾다가 조부모 원망하고, 남편 원망하다, 결국에 자책이란 독을 내 손으로 훌훌 넘기는 사람들.


어떤 생명도 누군가의 돌봄 없이 자랄 수 없거늘,

"특정 상대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거나 헌신하지 않는 관계 맺기"(57쪽)와 이를 가능하게 하는 공적 자원은 언제쯤 제 기능을 하게 될까.


할머니, 할머니 탓도 며느리 탓도 아닙니다..

그러니 서로 미안해하지도, 원망하지도, 자책하지도 맙시다. 여전히 답은 없지만요.

마지막 정류장을 하나 남겨놓고 사람들이 우르르 내린다. 아이가 우리도 내려야 한다고 내려, 내려, 한다.


아가야 너의 정류장은 종점이란다,
되돌아오는 길에는 한숨 자는 것도 괜찮을 거야.



*블로그에 쓴 글을  브런치에서도 발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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