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화를 보면서 극 중 인물에게 쉽게 감정이입을 하는 편이다. 특히 영화 속 인물들이 연애를 시작할 때의 그 설레는 감정에 관해서는 맥을 못 추는데, 그 예 중 하나로 심은하, 한석규 주연의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의 한 장면에서 나는 혼자 방에서 영화를 보다 그 미치고 터질 듯 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정지 버튼을 누른 채 한동안 마음을 가라앉힌 기억이 있다. 그리고 이번 영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보면서 <8월의 크리스마스>와 같이 격한 감정을 실로 오랜만에 느꼈다.
이 장면도 물론 설레지만 이 장면은 아니었다.
사실 이 영화의 제목이 시시콜콜한 이야기인 것과는 별개로 스토리 자체는 별로 시시콜콜하지 않다. 소재는 시시콜콜하지만 그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과정은 사실상 판타지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바로 그 지점이, 일상적인 소재와 환상적인 결말의 조합이, 우리의 뇌에 착각을 일으킨다. 마치 이 내용이 현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들인 것처럼 말이다.
내용은 간단하다. 얼마 전에 일방적으로 끝나버린 연애로 인해 힘들어하던 프리랜서 작가 도환은 억지로 끌려 나간 프리랜서 작가 모임에서 엉뚱한 매력을 가진 은하를 알게 된다. 영화를 공부하고 싶어 하는 은하는 도환의 연락처를 받아서 연락을 하게 되고 둘은 영상통화 친구가 되는 그런 이야기.
초면에 은하는 도환에게 자신이 동명이인의 배우 심은하보다 예쁘다는 소리를 좀 들었다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도환은 그런 은하 앞에서 배우 심은하가 영화에서 얼마나 초예쁘고(도환의 표현에 따르면) 아름다운 지를 역설한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이 장면에서 우리는 도환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살짝 엿볼 수 있다. 은하가배우 심은하와 자신을 엮으며 이야기를 꺼내는 의도는 물론 자신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보통의 경우는 초반의 어색함을 풀어내기 위한 일종의 도구로써의 성격이 강하다. 그런데 도환은 은하가 무안할 수도 있는 말을 연달아 뱉어내며 오히려 더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든다(물론 그 이후에 상황은 여차저차 무마된다. 대부분의 모든 상황들이 그렇듯이). 도환이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은 시나리오를 쓸 때도 마찬가지다. 연애를 자신의 관점에서 끊임없이 재생산해내고(재해석이 아닌) 원망하고 분노한다. 지난 연애에서 자신이 잘못한 점은 없다. 나는 최선을 다했고 그것을 알아주지 못하는 상대가 미울 뿐. 그런 감정으로 시나리오를 쓰니 내용은 늘 쳇바퀴처럼 맴돌고 나아갈 생각을 안 한다. 무엇보다 다음 연애에서도 저번 연애가 실패한 바로 그 똑같은 이유로 실패할 확률이 높다. 실패를 통해 얻는 깨달음이나 발전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뫼비우스의 띠를 끊게 도와주는 사람이 바로 은하다.
극 중 인물 은하는 감독이 의도적으로 설정한 심은하의 대리인인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도 그렇고 도환과 처음 통화하는 장면에서는 새 신발과 헌 신발의 비유를 하며 상대방의 입장에서도 한번 생각해보라고 말해주는데 이것은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에서 주인공인 이성재와 심은하가 나누는 대화에서도 나오는 말이기 때문이다. 가게에 걸려 있는 신발을 보며, 살 때는 예뻤었는데 신고 보니 지금은 별로 인 것 같다는 얘기를 하는 심은하를 보고 이성재는 “그건 네가 지금 그 신발을 신고 있기 때문이야.”라고 답해준다. 그 얘기를 들은 심은하가 19년이 지나 도환과 우리 앞에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 것일까?
이제야 새로운 관점에서 자신의 연애를 바라볼 수 있게 된 도환은 시나리오를 순조롭게 써 내려가고 은하와의 영상 통화 데이트도 계속된다.
이 영화를 보는데 어떻게 잘 수가 있어..
하지만 남자 친구가 있는 은하와의 관계가 마냥 좋을 리만은 없다. 더구나 얼굴 한번 보지 않고 계속 영상통화라니. 요즘 흔히들 말하는 썸에 바람피우는 관계를 한 스푼 첨가한 이 어정쩡한 사이를 끝내려고 도환은 은하를 불러낸다. 영상통화를 몇 시간씩 했던 사이인데도 무슨 기류가 감지됐는지 실제로 만난 둘은 어색하기만 하다. 둘의 별 소득 없는 대화 이후에 갑자기 연락이 되지 않는 은하, 그리고 점점 더 애타 하는 도환.
둘의 결말이 어떻게 됐는지는 직접 보면서 느끼시라. 내 글 실력으로는 그 감상들을 온전히 다 담아내지 못하겠다. 하나만 말씀드리자면 도환은 막판으로 가면 갈수록 더욱더 찌질해지고 은하는 영화 내내 그녀가 가진 매력을 뽐내다가 마지막에 가서 나는 그녀에게 퐁당 빠져버렸다. 요즘 충무로에서 핫한 엄태구와 이수경의 조합도 이 영화가 가진 매력 중 하나일 것이다.
겨울이 돼서야 여름이 소중한 걸 알게 되는 나..
다시 제목으로 돌아가 보자. 앞서 나는 이 영화가 소재는 시시콜콜하지만 풀어가는 방식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했었다. 아니 어쩌면 당사자가 아닌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면 다 시시콜콜한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겠다. 영화는 그래서 조금은 겸손하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이거 그냥 시시콜콜한, 별 것 아닌 얘기긴 한데.. 한번 볼래?”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우리의 일상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영화를 보는 일이 그렇고 남의 연애스토리를 듣는 일도 그렇다.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시시콜콜한 일상 중에서 그렇지 않은 순간들을 잠시 포착한 것일 뿐이지 않던가. 그러므로 이 영화는 영화와 현실을 비교해보며 잠시 우울해져 있을 우리들에게 제목으로 위안을 건네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