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땅을 보며 빨리 걷는 일이 익숙해졌다. 나는 대학교에 흔히 존재하는 아싸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에는 친한 사람도 없고, 괜히 마주치면 어색한 인사만 하고 지나치는 사이의 사람들뿐이라 자연스레 땅만 보고 빠른 속도로 걷게 되는 것이다. 대학생활 내내 그 걸음걸이가 계속되다 보니 그것은 어느새 내 습관이 되었다. 그래서 심지어 혼자 걷는 게 아닐 때에도 빨리 걸어서 같이 있는 일행들에게 핀잔을 듣기도 했다. 다급히 나를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면 그들은 내 걸음 속도를 따라가려 무척 애를 쓰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 습관으로 인해 생긴 장단점은 명확하다. 장점이라면 매우 목표지향적인 발걸음으로 인해 어딜 가든 예상시간보다 빠르게 도착한다는 것. 귀에 이어폰을 꽂고 정신없이 걷다 보면 목적지는 어느새 내 눈 앞에 와있었다.
반면 단점은 주변의 풍경과 건물, 사람들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몇 번 왔던 길인데도 못 보고 지나치는 것들이 많았고 길이 눈에 잘 익지도 않았다. 똑같은 길을 걸었던 친구는 주위 상가와 길을 이곳저곳 잘도 알고 있었는데 음악을 들으며 정신이 팔린 채로 길바닥의 모양새만을 보고 있는 내게 길의 전경이 머릿속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얼마 전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에 관해 친구와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 드라마의 주된 소재는 시간 여행이었다. 시간여행을 다루는 작품이란 대개 비슷한 구조를 따른다. 주인공이 어떤 사건으로 인해 과거로 갈 수 있게 되고 과거로 가서 현재의 불만족스러운 부분을 고치려 한다. 하지만 잘 될 줄 알았던 그 여행은 여러 우여곡절을 맞고, 바꾼 과거는 나비효과가 되어 현실의 많은 부분을 우그러뜨려 놓는다. 과거의 문제점 해결-> 새로운 문제 탄생-> 다시 해결의 구조를 반복하다가 결국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이 대부분의 시간여행 소재 작품이다.
이런 종류의 드라마나 영화를 보다 보면 항상 주인공은 바뀐 현재와 그 전 과거를 모두 기억하고 있는 데 반해 주변 인물들은 과거를 잊은 채 바뀐 현재만을 기억하고 있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바뀐 현실이 원래부터 자신의 것이었다고 믿으며 살아간다.
그런데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좀 억울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 사람들은 여러 삶을 살았지만 자신이 기억하는 삶은 하나이고, 그게 그들이 바라던 삶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만약 이 세상에 실제로 시간여행을 하는 주인공이 있고 내가 그 주변 인물이라면 어떻게 될까. 그 특별한 이가 과거로 돌아가 역사를 바꿔도 나는 모르는 일이지 않은가. 나는 그저 남들과 같은 평범한 사람일 뿐이니 말이다.
그래서 가끔 걷다 고개를 들고 돌아보게 된다. 내 옆을 지나치는 무수한 사람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 중에서 나와 인연이 있었던 사람은 없었는지. 누군가 과거에서 우리의 삶에 개입하기 전에 우리는 그 누구보다 뜨겁고 열심히 그리고 아프게 사랑하진 않았었는지. 수많은 삶들을 겪었지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 생각 없이 그냥 길을 걷고 있는 건 아닌지. 어떤 이에 의해 바뀐 역사 속에서 그렇게 당신을 잊은 채로. 내가 모르고 지나쳤던 당신도, 나를 잊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