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그리는 것, 디자인을 하는 것
나는 그림 그리는 것이 좋았다.
엄청나게 뚜렷한 목표를 가진건 아니었지만 초등학생 때 만화가를 꿈꿨던 것 정도,
중학교 때 김영세 디자이너의 책 이노베이터를 10번 정도 읽었던 것 정도,
초등학생때부터 하던 이지툰이 재밌어 컴퓨터로 그린 그림들이 너무 멋져보였고
나도 그런사람이 되어보고싶었다.
그때는 그 직업이 뭔지도몰랐지만 지금생각해보니 컨셉아티스트
그렇다고 특별히 그림을 잘 그린 건 절대 아니었다. 세상에는 너무도 그림을 잘 그리는 괴물 같은 사람들이 많다는 걸 인터넷에 올라온 그림을 보며 절실히 느꼈기에 내 그림은 더더욱 보잘것없이 보였다.
중학교 생활을 마무리할 때 즈음, 부모님과 디자인고등학교와 인문계 고등학교를 후보에 두고 어디를 갈 것인지 대화를 했다. 물론 부모님은 인근 디자인고등학교 진학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이셨다.
학생들의 질이 너무 낮은 곳이다 라는 이유였고 그 이유에 난 120% 공감을 하며 일반적인 인문계 고등학교로의 진학을 결심했다.
물론 나쁜애들이 가는 학교는 아니었지만 무서운 비주얼의 형들이 많긴했으니까...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서울대를 간 우리 형처럼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을 가야겠다라고 생각한 것이 고등학교를 가기전 나의 다짐이었다.
하지만 그 결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였고 남들처럼 평범히 수업을 듣고 야간 자율학습을 하던 1학년 1학기 초, 학교 앞에 미술학원 홍보용 공책을 나눠 받았고, 그 공책에 있던 그림들을 보는 순간 참고 있던 그림에 대한 욕망이 한순간에 터져버렸다. 나도 모르게 그림에 대한 열망이 있었나 보다.
수업도 제대로 듣지 않은 채 하루 종일 공책에 있는 자그마한 00 대학교 '발상과 표현' 우수작 그림을 보고 또 보았다. 그날, 야간 자율학습 시간이 되어 담임선생님을 찾아가 조퇴증을 끊었고 미술학원이 모여있는 부산 동래구 명륜동으로 나섰다. 도착하자마자 보이는 건 엄청난 수의 미술학원들, 물감을 잔뜩 묻힌 앞치마를 걸치고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먹는 학생들, 동그랗고 길쭉한 화구통을 어깨에 메고 학원으로 향하는 학생들...
갑자기 새로운 세상으로 와버린 기분이었다. 고등학교에서 버스로 10분 거리에 있는 곳에서 말이다.
부모님께 상의도 없이 일단 공책을 준 그 학원과 인근에 있는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 학원에 들어가 내가 그렸던 그림 몇 장과 함께 무작정 상담을 받았다. 학원비가 얼마인지, 어떤 그림을 그리게 되는지 등등
상담이 끝나고 마음속으로 학원을 정한 뒤 등짝 몇 대를 맞을 각오를 하고 집에 들어가 어머니께 미술학원 상담을 받고 왔다고, 미술학원을 다니고 싶다고 털어놓았다. 돌아온 대답은
'그래라'
생각보다 너무 쉽게 승낙을 받아 얼떨떨하지만 너무 기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후일담으로 약 13년쯤 지났지만 그때 엄마의 심정이 어땠는지는 얼마 전에 듣게 되었다.
'점마 저거 공부도 잘 못하는데 본인이 하고 싶다는 거 그냥 하라고 해보자...'라고...
지금 생각하니 중간 따리 성적을 유지한 게 한몫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