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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스카 Dec 24. 2018

나의 한 해

파랗게 멍든 시간들.27

너는 나한테 뭘 줬을까. 연말 즈음에 와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언젠가 네가 나한테 물었던 적이 있지. "왜 그렇게 나한테 잘해줘?" 그 한마디에 순간 멈칫했어. 글쎄. 잘 해주는데 이유가 필요한 건가. 잠시 지나 난 너에게 이렇게 대답했지. "나는 너라서 잘 해줘. 네가 좋아서. 어느 한구석이 널 좋아하는 이유가 되는 게 아니야. 나는 그냥 네가 좋은 거야." 이 대답을 너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왜 좋냐고 역으로 질문하면 항상 이유를 하나하나 얘기해 주던 너였잖아. 그때 나는 '그 이유들이 아니면 너한테 좋은 사람이 아니게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곤 했어.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한 해의 끝에 드는 생각은 '너한테 난 뭘 받았던 걸까.' 혹은, '나는 그 질문을 받을 만큼 잘 해줬었는가.' 그래봤자 답변하나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지만 말이야.

 지금에 와서 너에 대해 기억하는 감정들을 돌아보자면 미안함과 고마움이 컸다고 말할 수 있어. 가끔은 네가 정말 미웠지만 서운하고 아팠지만, 죽을 만큼 원망스러운 밤도 있었지만 결국 꿋꿋하게 앞서 나가 자리를 지킨 건 미안함과 고마움이었어. 잘해주고 싶었어. 너한테. 정말, 잘해주고 싶었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에게만큼은 정말 떳떳하고 싶었어. 그게 사랑이라고 한다면 더는 할 말이 없네. 난 사랑하고 사랑했던 거니까. 어쨌든 그 말을 들은 이후 나는 너한테 더 애쓰려고 했어. 내가 단지 너라서 좋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그러다 보니 그게 이유가 또 되어 버렸어. 어쩌면 그 이유가 오히려 너에게 더 열심히 해야 하는 목적이 되어 버렸을지도 몰라. 그래. 거기에 집착했다는 가능성도 존재한다고 생각해.

 네가 준 건 뭐였고, 내가 받은 건 도대체 뭐였을까. 왜 기억이 남긴 자상엔 희미하게 말하는 네가 흉터로 자리 잡고 있을까.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한다. 지금의 날 살게 하는 건 네가 아니지만 어떤 지난날의 날 살린 건 네가 아닐까 하고.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네가 밉지 않을 수 없는 거니까. 그럼에도 죽도록 원망스러워질 때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었을까.' 싶을 만치 잔인하던 네가 아파진다. 가끔씩 내 손목이 아려올 때 그 시절의 내가 한 번도 좋았던 적은 없어. 그 모든 것들, 모든 문제들이 한 번에 내게 쏟아지던 그때 적어도 그간의 정이 있었다면 그러진 말았어야지 싶어. 그렇지만 서도 네가 밉지 않았던 건 이제는 그냥 추억이 되어버린 기억들 때문일 거야. 그래도 네 친구들을 생각만 해도 속을 게워내려고 하는 내가 있어.

 우습겠지만 용서는 아직 못 했다. 미워한 적이 없을 뿐, 용서한 적은 없다. 그래도 이제는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 생각하며 산다. 겨우 상처를 좀먹고 자란 내가 온전하게 견고해지는 일은 많은 시간이 지난 나중이겠거니, 아니 어쩌면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 순간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그 시절을 떠올린다 해서 맘이 무거워 지던 시절이 지났다. 어느덧 덤덤해졌지만 그래도 가끔은 잘못 삼킨 약처럼 입이 쓰다. 괜히 멍해지고, 그때의 내가 어떻게 했어야 했는지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다시 정신을 차리고 일상에 집중을 한다. 배운 적 없이 스스로 구멍 난 곳을 메우는 법을 익혔으니 가끔 새는 일 또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도 잘 살고 싶다. 무기력한 채 하루의 계획이 다 무너지지 않고, 굳이 애쓰지 않아도 씻고 밥을 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 나의 행복을 의심하지 않고 살고 싶다. 건강하게 살고 싶다. 나의 고마운 사람들 손을 잡고, 온도를 느끼면서 울컥할 때 한 번쯤 안길 수 있는. 그들에게 이해와 존중, 그리고 사랑 그런 것들을 주고 싶다. 물론 처음부터 나에게 있던 것이 아니다 보니 없이 사는 것도 무리는 없지. 그저 나의 바람일 뿐. 응. 맞아. 우린 아무것도 없다. 그냥 운 좋게 오늘도 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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