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랗게 멍든 시간들.31
한때 내 세상이 온통 너로 물든적이 있었다. 몇날 며칠 네 생각으로 밤을 지새우고 전하지 못해 답답한 내 마음을 온갖 글들로 적어내려갔다. 아직도 잊지 못할 그때 우리가 함께했던 그 시간, 그 공간, 그곳의 공기, 흐르던 모든 감각들. 옅은 하늘색이다가, 진한 핑크빛이다가, 어느새 나도 모르게 빨갛고 깊게 물들어가고 말았다. 눈을 떠보니 나는 이미 네것이었던 시간. 몇년이 지난 후에도 문득 떠올라 너의 자취를 뒤지다가 우리의 시간을 기억해 보다가 머리를 헝크러트리기 일쑤였다.
얼마전 알게된 어떤 이가 있다. 그녀를 보자 마자 네가 바로 떠올랐다. 너와 그녀는 닮은 구석이 너무 많다. 하얀색에 추우면 쉽게 상기되는 피부, 유쾌한 웃음, 혀가 꽤나 짧은 말투, 웃을 때 초승달이 되는 눈, 눈 옆에 점, 작은 키, 호불호가 강한 입맛, 좋아하는 가수, 풍기고 있는 분위기까지. 신기하게 너와 생일도 같았다. 그녀의 생일을 생각하다보면 어느새 다시 너에게 돌아갔다. 내가 지금 그녀에게 흔들리는 이유는 그녀여서일까 너와 닮은 사람이여서일까. 난 사실 잘 모르겠다. 그저 요즘 내내 그 사람이 자꾸 눈에 아른거리고, 그녀의 목소리가 귓등으로 들려오는것 밖에는. 병에 걸린것 마냥 자꾸 머리가 아프고 양 볼이 발개져 온다. 그때의 너에게 대차게 흔들려 오랜기간 열병을 앓았던 것처럼. 자꾸만 흔들리는 내가 싫다.
시작도 끝도 오래도록 앓아야 했던 너였기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기억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시간이 흐르기에는 참 많은 날들이 지나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 그 때 네가 내게 했던 말은 나에게 가치관에 있어서 큰 영향을 주었고 이를 통해서 남들을 위로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사실은 참 감사해. 끝까지 이해하는 척 하지 말라고 했던 말.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너를 말 한 것 뿐인데, 이게 이해하는 척이라면 이해라는건 무엇일까. 작년 한 해 나의 가장 큰 사색은 이 질문에서 출발했다.
이해라는건 가치관이란 책상 위로 쌓아 올리는 블럭. 그래서 가치관이 변할 때마다 읽었던 책에서도 들었던 강연에서도 새로운 깨달음을 얻곤 한다. 서당에 사는 개가 삼 년을 살고 풍월을 읊는다고 풍월을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것이 어디 가서 입을 열고 싶으면 죽을 때까지 공부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고 느낀다. 한 쪽에서 두어 번 만져본 것으로 코끼리 박사가 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타인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지금 내 책상에 올릴 수 없는 모양과 무게의 조립이기 때문이다. 타인을 꼭 이해하라는 말은 아니다. 그 사람의 가치관을 가지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 다만 나도 책상이 달랐다면 같은 블럭을 가지고도 저렇게 조립할 수 있었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으면 할 뿐이다.
결국 나는 책상이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온전한 이해라는건 존재 할 수 없다. 그저 이해하는 노력을 할 뿐. 이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다. 그래서 너와 생일이 같은 그 사람에겐 더 많은 노력을 하려 한다. 내가 알 수 있는 문장이 될 때까지 읽으려 한다. 온전히 읽을 순 없겠지만. 아니, 내가 알 수 없는 부분은 물어보려 한다. 당신의 뜻이 무엇인지 나는 말 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나는 눈치가 빠른 생물은 아닐 뿐 더러, 속에 싸두고 있는걸 알아 낼 수 있는 능력은 더욱이 없다. 나는 알아가고 싶을 뿐이다. 그 사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