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랗게 멍든 시간들.32
나 오늘 자취방 정리를 하다가 네가 두고 간 로퍼를 발견했지 뭐야.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생각지도 못한 그때의 감정이 가득 담긴 그 순간 안의 ‘우리’를 마주했어. 너를 비롯한 그날의 하루가 온통 떠올랐고 그 날 같이 들었던 노래, 그 시간의 향기, 그 향기의 기억, 이 무수한 것들은 다 과거형이 되었다가 이젠 다 사라졌다 여겼는데 오늘은 신발 상자에 고이 잠들어 있던 로퍼를 마주해서 그런지 더딘 하루였어.
나는 누구나 그렇듯 이 현실 저 현실 욕을 해대면서 결국 현실에 순응하고 마는 양가적인 면모를 지닌 취업 준비생 중 한 명으로 여전히 지내고 있고, 정적인 나와 잘 어울리게 모든 일상들이 그저 그렇게 흘러가. 와중에 시간에는 방향성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시간축이 다른 과거와 과거가 공존함을 동시간대에 느껴버렸을 때, 한 공간 다른 위치에서 발생한 너의 한 행동과 다른 행동을 같은 때에 감지했을 때. 시간은 원형의 파동 같은 것임을, 마음에 묵혀둔 대상을 위주로 정지하지 않은 채 속도만 변하며 회전하고 있다는 것을 느껴버렸어. 더불어 내가 지금 제일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사안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지.
지난날, 소중했던 내 하루들을 되새기며 그럼에도 얼마나 행복한 사람이었을까. 감사함에 대해 다시금 깊게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어. 이젠 누군가의 사랑보다 내가 나를 더 사랑하고 싶고, 다소 무뚝뚝하고 냉소적이었던 모습이 변해 나를 사랑하는 만큼 더 많은 사랑을 마주하고 싶은데, 그럴 수 있겠지? 아프지 말고 좀 더 행복해지고 싶어 나는. 내가 외로움을 생각하지 않아서, 나의 외로움이 어디에 있는지 관심조차 가지 않게 되고 싶어.
이제는 각자 서로에게 물음표도 느낌표도 붙일 이유가 없는 지금의 너와 나라서, 그저 마침표로 끝나는 안부 아닌 안부를 물어봤어. 그 시간 속의 ‘우리'는 더 이상 없으니깐. 그 로퍼를 신고 나에게 걸어와 안기며 '우리'라는 시공간에서 너와 나는 어쩌자고 그리도 많은 느낌표와 물음표들을 서로를 향해 건넸을까. 쉬이 나를 잊어갔던 너와는 다르게 나는 아직 발끝에 채이는 그 당시의 사랑 안에 있던 온갖 부호들과 허겁지겁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서 이렇게 종종 마주하게 되는 그 부호들의 잔 부스러기들 같은 미련들, 그리고 미화된 기억들로 인해서 새로운 문장으로 걸음이 옮겨지지가 않네.
어찌 생각해보면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 솔직할 수 있다고 생각한 그 앞에서도 말하지 못하는 생각과 감정이 있더라. 오래되었던 사이에 이런 걸 느끼는 것도 참 이상한데. 겁이 많다고 하는 게 이런 거였나 싶다. 사실은 있잖아, 얼굴을 붙잡고 사랑한다고 외치고 싶을 때가 있었어. 사랑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그저 그러고 싶었어. 사실 사랑하는 것 같다고 말하고 싶었던 건지도 몰라. 인생 최고의 가치는 사랑이라고 망설임 없이 말했던 내가, 의문 속 감정을 사랑이라고 느끼는 것 같다고 주저앉아 이야기하고 싶었어. 그때 나는 그랬어.
아마도 이 또한 나를 믿지 못하게 만든, 그런 이유였을지도 몰라. 헤어지고 나서 너를 미워하지 않으려고 자기 최면을 걸어댔고, 그 와중에도 미안해하며 마음이 아팠던 건 내가 제일 가진 것도 돈도 없고 살도 많이 찌고 자신감도 자존감도 바닥치고 있을 때가 우리가 만날 때라서 많이 미안하더라. 잘 돼서 돈 벌고 능력 있고 인정받는 남자친구가 되고 싶었는데. 저 마음은 나 정말 간절했는데.
곧 네 생일이 있는 2월이야. 나는 그저 그렇게 지내. 그냥 궁금해서, 별로 생각도 않던 질문을 건네. 너는 어떻게 지내.
글. 김태현
그림. 윤종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