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랗게 멍든 시간들. 37
널 처음 봤을 때 내 머릿속엔 온통 특이하다는 생각뿐이었어. 낯을 많이 가리는 내가 유독 너를 처음 봤을 때 말이 많아지고, 대화가 어느 정도 정리된 뒤에 오는 침묵이 편안했어. 맞아. 침묵이 어색하지 않은 사람. 그래서, 조금 취한 상태로 언덕길을 내려가던 그 밤이 즐거웠어. 별 말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즐거웠어.
너와 술을 먹고 같이 걸으며 너희 집으로 가던 길에 너와 나는 세상 눈치 보지 않고 떠들어대며 농담하고 웃고 그렇게 걸었어. 걷는 걸 좋아한다는 것, 너희 부모님은 어떤 분들이 시라는 것, 너의 저번 연애는 어땠는지 같은 것들을 우린 얘기하고 또 나에 대해서도 얘기해줬어. 그런데 있잖아. 그렇게 너를 알면 알수록 네가 조금씩 커지는 건 뭘까.
너를 더 알고 싶고, 너의 표정이나 말투, 행동에서 오는 뉘앙스를 알아가고 싶어. 이렇게 좋아한다고 하면서 네가 다른 누군가에게 나와 같은 맘일까 무서운 것도 있어. 혹시 부담이 돼서 멀어지지 않을까 하는 맘도. 그런데 내가 용기를 내었을 때 네가 사랑을 시작하면 어쩌지 싶어서 그것마저 겁이나. 그래도 용기를 내야 할 때 용기를 낼 자신은 있어.
이런 욕심 많은 내가 얼마나 겁 많은 이인지. 너에게 속삭이면 웃기겠지. 세상 처음 해보는 것들이 이렇게나 많다고 속삭이면 웃기겠지. 나는 왜 겁 많지. 모르겠다. 그래서 너에게 더 조심스러운 건가. 이런 내가 너에게 어떤 사람일까. 그저 아는 오빠나 친한 사람 정도일까. 적어도 괜찮은 사람이고는 싶어.
매일마다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내가 네 생각을 하고 있으면 그중 한 순간만큼은 너도 내 생각을 해주지 않을까, 하는 헛된 생각을 해 봤어. 오늘도 너에게는 연락이 오지 않고 있고, 나는 이렇게 파랗게 물들어가는 창 밖을 바라보며 끝없이 네 생각을 하고 있어.
그래. 요즘 들어 생각의 대부분을 너에게 소비하고 있다. 소비하고 싶은 생각이 너로만 한정이 되어 있다. 나는 다시 너를 생각하고, 너의 세계로 들어가고 싶어 졌어. 딱 네 팔 길이만큼의 세계 말이야. 너의 손에 잡히는 만큼의 생활로 말이야. 이 선을 넘고 싶어서 어쩔 수 없을 때 나는 깨달았어. 너의 의미를. 너에게 절대 가볍고 싶지 않다는 나의 생각을. 조금 더 잔잔히, 조심스럽게 그리고 잠깐 스쳐 지나가는 존재가 아닌 온전한 너의 일부. 그렇게 너의 세계가 되고 싶어 졌어.
그러고 보니 요즘 밤을 샐 정도로 재미가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던 어떤 연예인의 헛소리가 계속 귓가에 맴돌고 있어. 과연 그런 일이 내게 존재했던가... 하면서 생각을 해 봤는데 아, 있었구나. 너를 그리는 일.
글. 김태현
그림. 윤종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