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랗게 멍든 시간들. 43
있는 그대로의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게 왜 어려운 일이냐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도 쉽지 않지만 누군가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아는 것부터가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그렇다. 내가 사랑하고 있는 모습이 그 사람의 있는 그대로가 아닐 수 있잖아. 최대한의 좋은 모습이거나 내가 보고 싶은 모습만 보는 걸 수도 있잖아. 내가 사랑하고 싶은 모습만 그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잖아. 내가 알고 있는 그 사람과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 사이에 생기는 균열은 그래서 생긴다. 누군가는 보고 싶은 것만 봐서, 누군가는 숨기거나 다 보여주지 못해서. 그 균열마저 사랑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라서. 그러니 누군가를 안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소용없는 일인가.
진심이라는 것도 분명 생김새가 있을 텐데. 그 진심의 형태가 어떻게 생겨야 나에게도 남에게도 가장 좋은 진심인지 몰라서. 정작 보여줘야 하는 사람에게, 이쁜 진심을 보여주고 싶어 아무리 보여주려 노력해도. 정말 아름다운 진심의 형태까진 아니더라도 그나마 비스름한 생김새조차. 그 조차. 나타내지 못하고 결국 모든 것이. 다 끝나버릴 때면 그런 아쉬움보다 더 큰 아픔은 없는 것 같다.
모든 게 후회된다고, 제발 꺼져달라는 말 한마디로 인해 내 마음은 모든 게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는 줄 몰랐다. 나는 가진 진심 그대로의 나를 다 꺼내 보인 반면 너는 숨기고 있었구나. 다시 한번 알게 되는 건 결국 한 사람의 희생이 뒤따르지 않으면 둘의 관계는 지속되기 어렵다. 이기적인 사람은 끝까지 이기적이고 희생하는 사람은 끝까지 희생하기 마련이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한정적이다. 희생하느냐 버리느냐.
나를 믿어줘야 하는 사람에게서 살아온 삶을 부정당하는 말을 듣는 상처는 보통 사람의 말보다 몇 배나 깊게 파인다. 아무리 그래도 같이 보낸 시간이 있는데 저렇게까지 말을 한다고? 가끔은 상식 이하의 말들을 하기도 하는 그 몰지각함, 무식함에 인간에 대한 신뢰가 무너질 지경이다. 어디 가서 그런 말을 하면 쓰레기라고 욕을 먹을, 그렇기 때문에 내 사람이다 생각한 사람에겐 더 하면 안 될 말들. 특별하다면 특별한 성향을 기다리고 감당해내어 줄 그릇이 도무지 될 수가 없는지, 그래서 이제까지도 남들에게서 모든 불확실성과 불투명함을 제거했던 건지.
다른 사람보다 인내의 한계점이 높은 나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보고 싶어 하는 엄마처럼 언제나 잘 참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상상해 보곤 하지만 아마 이러한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은 인내보다는 뛰쳐나가버리는 것을 선택할 것 같다. 나 역시 그러한 선택을 할 수 있다. 또한 어떤 시점에는 그래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누구보다 평화를 원하고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싶은 것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불쌍하게도 인내의 한계점이 높은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이용당하기 십상이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늦게 알아버렸다. 끝까지 희생당하는 역할은 항상 내 몫이 된다는 걸, 지나고 나서야 배워버렸다. 그런데 있잖아. 네가 아무리 이기적이라고 해도 나는 너에게 있어서 언제나 무장해제가 되는 걸 어쩌겠어. 몇 개월간 대답이 없는 것으로 대답을 했던 너에 대한 소식들이 들려온 순간 원망스러운 반면, 반가웠다는 사실을 너는 모를 거다. 또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 너와 대화를 할 수 있을지 아니 영영 못하게 될 수도 있겠지만 당분간 나는 너의 목소리를 회상하며 살아가겠지.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 너, 더 이상 너에게 다가갈 수 없는 나. 그런 관계를 이어가며 흐르는 시간에 기대어 사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는 것 같다.
잔뜩 취해있던 밤. 너를 원망하면서도 그리워했던 그 밤. 쓰라린 꽃잎 냄새가 나를 밤새 맴돌았고, 그 가냘프고 날카로운 가시에 매 순간 찔렸지만. 내내 가슴 한편이 꽉 차오르는 기분을 오랜만에 느낄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글. 김태현
그림. 윤종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