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RONTO, CANADA
너무 오랜만에 마주한 내 미소에 갑자기 코끝이 찡하다. 이렇게 맑게 웃을 수 있었구나. 여행에서 내가 이랬었지 참. 막혀있던 피가 이제야 도는 기분, 이제야 쉬어지는 거 같은 숨. 나는 사 년 만에 여행 중이었다.
토론토에 도착한 어제, 부랴부랴 체크인을 하고 어릴 때부터 알던 동생의 친구를 만나 함께 다운타운을 돌아다녔다. 27살의 그녀는 어느새 부쩍 어른이 되어있었고 우리는 종일 생각보다 더 깊은 대화를 나눴다.
겨울의 토론토는 여행을 하기에는 그렇게 좋은 시간대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아침 일곱 시 반쯤 해가 올라 다섯 시 반이면 해가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름에는 백야 현상으로 밤 열 시에도 해가 쨍쨍하다고 하는데 그건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다. 난 지금 겨울의 토론토에 와있으니 말이다. 저녁을 먹고 더 긴 시간을 그녀와 보내며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일이 있다는 그녀를 배웅하고 나는 이어폰을 끼고 숙소로 향했다. 이틀 내 잠을 들지 못했던 나는 밤 10시가 되기도 전에 잠에 들었고 새벽 다섯 시에 눈을 떴다.
갓난아기 때나 긴팔을 입고 자고 평생동안 잘 때 긴 옷을 입은 적이 없었다. 근데 캐나다에 와서 나는 후리스를 입고 양말을 신고 패딩 바지를 입고 잠에 들었다. 더 자야 한다며 혼자 주문을 외다 찬 공기에 코가 시려 잠이 깨버렸다. 다 괜찮은데 이 겨울에 히터가 안 되는 도미토리는 또 처음이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한국에 있는 사람들과 연락을 주고받다 눈물이 나버렸다. 항상 그랬듯이 풍족한 여행은 아니지만 이번 여행은 특히 마음이 풍족한 여행임에 틀림없었다. 내게 무언갈 주는 걸 아까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마음에 너무 고마워 따뜻한 눈물이 흘렀다.
창문 밖에서 공사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공사를 많이 하는 거 같기도 한데 여유로운 외국의 특성상 한 공사를 길게 하기도 한다. 어쩌면 빨리빨리의 민족인 우리에게 답답할지도 모르겠지만 천천히 정확하게 하는 게 더 맞는 일일지 모른다. 공사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해가 떴다는 뜻이기에 나갈 준비를 하고 밖으로 향했다.
구더함 빌딩을 지나 세인트로렌스 마켓으로 향했다. 구더함 빌딩은 토론토 시내 한복판에 있는 삼각형으로 잘라둔 파이 같은 모양의 빨간 벽돌 건물이다. 1892년도에 지어진 구더함 빌딩은 토론토를 대표하는 건축물 중 하나로 특별한 용도로 사용되진 않고 일반 건물이지만 이국적이고 아름다운 외관으로 포토그래퍼들에게 토론토 출사 지역으로도 꼽힌다.
한참 동안 구더함 빌딩을 담고는 한국의 중앙시장 같은 느낌의 세인트 로렌스 마켓에 들어섰다. 100명이 넘는 판매상이 있는 세인트 로렌스 마켓에는 정말 많은 볼거리들이 있었다. 자신의 색을 뽐내는 이쁜 색의 과일들, 와인과 한입 하면 스르르 녹아버릴 것 같은 수제 치즈, 지금 당장 쪄먹고 싶은 어마무시한 크기의 킹크랩 다리까지 어마무시하게 많은 종류의 식료품들과 상품들이 판매되고 있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파이집에서 파이 두 개를 구매하고 계단옆 테이블에 앉아 파이를 한입 베어 물었다. 단 음식을 별로 안 좋아하는 나로서 정말 너무너무 달기는 했지만 바삭바삭한 생지가 입 안에서 확실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반대편에 앉아있는 노부부가 빤히 나를 바라봤다. 눈을 마주치고는 그들을 담았다. 따뜻한 눈웃음에 마음이 녹았는데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일정을 궁금해하는 엄마에게 마켓 사진 몇 장을 보내주고 다음 여행지를 향해 마켓을 나섰다. CASA ROMA는 왕조시대에 주택이 늘어선 고급 주거 지역이다. 그 부근과 그곳에 있는 18세기에 지어진 성을 보기 위해 토론토 다운타운에서 한 시간 반정도 걸어서 북쪽으로 올라갔다. 영화 속에서나 볼법한 건물들이 분명 많았고 재각각 문에 걸어 노은 크리스마스 리스들도 몽글몽글한 기분을 내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 외에도 길가에서 운명을 다한 청설모, 엎어져있는 쓰레기통, 무언가를 찾기 위해 쓰레기통을 뒤적거리는 노숙자도 볼 수 있었다. 이 문장들은 위험한 동네라는 걸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멋진 글과 사진들 속에 숨어져 있는 진짜 토론토의 모습이다.
CASAROMA에서 신나게 건물들을 구경하다 보니 시간이 벌써 많이 흘러 예약해둔 미술관에 가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토론토 대학을 지나 다운타운 쪽으로 들어가면 Art Gallery of Ontario 줄여서 AGO 가 있다. 갤러리 운영뿐만 아니라 미술대학도 함께 운영하고 있는데 심플하면서 독특한 건물의 외형과 널찍한 내부에 혀를 내둘렀다.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빛이 오르세 미술관이 떠오르기도 했는데 스크류바같이 베베 꼬여있는 계단을 보고는 루브르 떠오르기도 했다.
학교에 돌아가 3월이 되면 첫 대학원 전시를 한다. 붓을 들고 처음으로 200-300호 같이 큰 작업을 하기로 교수님과 이야기를 했는데 이곳에서 많은 기운을 받고 가고 싶었다. 큰 화면을 구성하는 일은 많은 힘이 들기도 하지만 많은 힘을 받기도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직은 이해가 되지 않는 작업들도 있었지만 분명히 내 가슴을 파고들었던 작품들이 있었고 앞에 배치되어있는 의자에 앉아 한참을 바라보기도 또 마음이 한껏 울렁이기도 했다. 또 나도 누군가에게 이른 마음을 들게 할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싶다고도 생각하고 말이다.
미술관을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다가 전날 그녀와 함께 구경했던 큰 마켓에서 4개짜리 요플레와 피자 한 조각과 과자를 사들고 숙소로 향했다. CASA ROMA에 향하는 길에 마주한 정신 나간 아저씨 때문이었는지 하루종일 누군가 내 옆에 가까이 지나가기만 해도 예민해져 소리를 차단하기 위해 이어폰을 꼈다. 야경을 위해 큰 건물숲에 불을 끄지 않고 퇴근한다는 이 회사들의 마음을 좀처럼 알 수 없었지만 그 마음을 위해 정부에서 저녁 7시 이후에는 전기료를 절감해준다는 말을 듣고 토론토사람들의 마음들은 확실히 토론토를 위한다고 생각했다.
한국이었으면 저녁도 먹지 않았을 시간에 해가 다 져버려 숙소로 향한다. 어둠이 들이쳐 겁이 날 법도 한데 빽뺵한 건물들 중 불이 꺼져있는 건물이 단 한 개도 없다. 큰 땅에 띄엄띄엄 있는 크리스마스 장식을 한 가로등들이 부족할지 몰라도 건물 안의 불빛이 내 앞길을 비춰준다. 야경을 보고 멋지다고 생각한 적이 별로 없는데, 겨우 이튿날 토론토 참 멋진 곳임에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Dec 20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