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하모해수욕장 앞에 트렁크를 열고 바다를 보며 책을 읽고 있다. 레이 2인승 밴의 최대장점이다.
생각해 보면 약 2년 전 우울증이 왔을 때도 생각의 꼬리를 끊기 위해 책을 읽기 시작했던 것 같은 데 작년 생일에 선물 받고 읽기를 미뤄두었던 두꺼운 책을 펼쳤다. 에세이인 책의 초반 내용들은 우울증에 관련된 내용들이었고, 보고 눈물을 흘리는 나를 보자니 또다시 우울증이 재발된 건가 싶었다. 지난 내가 우울이라는 바다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생각해 보다가, 그냥 이대로 끝내는 게 좋지 않으려나 싶다가, 나 자신이 무서워져 이대로 글을 쓰기 위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하루 만에 갑자기 찾아온 제주의 가을은, 바람이 세차고 공기가 차갑고, 파도가 높았다.
가을이 찾아오고 하늘이 맑은 적이 없어서 아직은 반짝이는 갈대를 보지 못했지만, 반짝일 날이 기다린다기보다는 이미 아는 모습이니까 그냥 그렇겠지라고 생각하다가, 이내 이런 내가 낯설었다.
요새는 부쩍 우는 일이 많아졌다.
손에 쥔 걸 놓아야 다른 나로, 세상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아는데 생각처럼 쉽지가 않다. 이렇게 외롭게 지켜낸 나의 생활과 겉모습만 보고 멋진 삶이다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토록 위태로운 균형을 지켜내는 건 바다가 깊은 줄 알면서도 뛰어드는 바보 같은 일이지만 나는 바닷속에 한 번도 못 본 물고기들을 보고자 이렇게 위험을 혼자 감내하나 보다.
책을 읽다가 갑자기 다시 잡생각이 많아져서 책을 덮고 트렁크 문도 닫았다. 172cm에 여자치고 작은 키는 아니지만 다리를 굽히니 트렁크 내부에서 잠을 잘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렇게 그냥 노래를 들으며 몇 분을 멍하니 보냈다.
참.. 그래도 내가 제주에 온 이유는 내 공간에서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기 위함이었지..
그리고 작업실로 향했다.
얼마 전에 넣은 거 같은 기름은 귀신같이 항상 내가 돈이 제일 없을 때 떨어지기 마련이었고, 오늘도 몇 킬로밖에 달릴 수 없다고 써져 있는 계기판의 숫자가 나를 압박했다. 내일 서귀포에 있는 예술인센터에 지원금 상담을 받으러 가기로 했는데 부디 그전에만 버텨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제주는 서귀포 가기 전에 중문이 기름값이 저렴하다.)
작업실 마케팅을 위해 꾸역꾸역 유지하고 있는 블로그에 지난주에 다녀가신 수강생분들의 수업후기를 작성했다. 친구들이 올 때면 갈 수 있는 이쁜 카페나 맛집의 후기도 자주 올리려고 노력하는데, 마케팅을 위한 수단으로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내겐 그냥 현타가 오는 행위여서 오늘도 후기를 쓰다가 그만뒀다.
생각해 보니 오후 세시가 되도록 끼니를 챙기지 못해서 냉장고에 남은 삶은 계란을 먹으며 요즘 즐겨보는 이혼숙려캠프를 봤다. 그 프로그램은 보면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지만 나는 사채까지는 안 쓰는 상황이니 다행이지.라는 이상한 위로를 받는다. 시청하던 회차를 끄고 핸드폰에 있는 루미큐브를 켜서 게임을 했다.
체스 이후에 처음으로 하는 뇌를 쓰기 좋은 게임인데 집중하기 전에 하기 좋은 게임이라 작업을 하기 전에 시작해서 몇 판을 지면 딱 좋은 집중력으로 질려서 게임을 끈다.
작업을 했다. 사실 빈 캔버스보다도 작업 중인 캔버스가 이젤에 올려져 있을 때 그것이 주는 압박감이 더 심하다. 그림들이 완성해 달라고 아우성치는 것 같달까? 이럴 땐 어느 정도 무시도해야 한다. 성급하게 했다간 작업이 망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지금도 신나게 작업을 하다가 이러다간 산으로 갈 수도 있을 거 같아서 하던 부분만 정리를 하고 글을 쓰기 위해 핸드폰을 들었다.
사실 모든 일이 상대적이라는 거 내가 제일 잘 아는데..
남들이랑 비교 안 되는 게 좋아서, 여기에 와서 나를 나의 그대로만 볼 수 있어서, 그게 제주도의 장점인 거 같다고도 했는데…
어쩐지 제주도에 온 지 약 3개월 만에 우울증이 다시 온 것만 같다.
20251021 18: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