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로 떠나기 전
어떤 말로 내게 소중한 그 사람을 소개해야 할지 한참을 썼다 지웠다,
그렇게나 소중한 그 사람에 대해 쓰려고 한다.
찬 바람이 적지 않게 불어오는 날, 하늘이 까마득하게 높았던 어두운 밤, 뼛속 깊이까지 외로웠지만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지 않았던 그때쯤에 처음 만난 사람이었다. 그녀는 햇살같이 밝은 웃음으로 내 속은 알지도 못하고 그렇게나 환하게 나를 반겨줬다. 별로 내키지 않았던 룸메이트가 여행 메이트가 되는 데까지는 그렇게 길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기름과 물처럼 정말 달랐던 우리지만 서로의 감성을 일깨워 주기에는 아주 적절한 사이였고, 그녀가 정말 내 사람이라고 느낀 건 알게 된 지 일 년이 채 안돼서였다.
어느 가을날 워홀을 끝내고 한국에 들어온 지 반년도 채 되지 않아 문득 다가온 향수에 왠지 모를 먹먹함에 앞뒤 생각 없이 비행기표를 덜컥 사버렸다. 처음 느끼는 감정에 아리송한 마음으로 그녀에게 연락을 했다. 학기 중이었던 그녀는 여행은 언니와 함께 해야 한다며 짧지만 금토일 일정으로 나를 따라 그녀 또한 비행기표를 덜컥 사버렸고, 그렇게 우리의 두 번째 여행이 시작됐다. 여행기간인 15일 동안 함께한 시간은 고작 3일이었지만 그녀가 도착하자마자 거짓말 같이 그쳐버린 비와 언제 어두웠냐는 듯 맑게 갠 하늘, 나를 믿고 따라와 준 그녀의 마음 또한 마법같이 참 황홀했다. 거짓말 같이 다가왔던 두 번째 여행은 붙잡지 못할 정도로 아쉬울 틈도 없이 그렇게나 빠르게 흘러갔다. 그녀가 날 믿어 이렇게 떠나왔듯, 몇 달 뒤 그녀가 떠나갈 싱가포르에 이번엔 내가 널 믿고 떠나겠다는 기약 없는 약속만 남은 채.
그녀와 함께 떠난 여행이 잊힐 즈음 나는 또 꿈속과 같은 유럽에서 허우적 대며 돌아왔고, 취업에 성공한 그녀는 언제 돌아오겠다는 기약도 없이 싱가포르로 떠났다. 나는 언젠가 또다시 함께 떠날 여행을 그리며 항공사 어플을 하루에도 몇 번을 껐다 켜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었다.
봄과 여름 그 사이의 어느 날, 유난히 가로등 불빛이 빛나던 날, 조금은 지쳤던 퇴근길, 별 의미 없는 이야기를 나누다 우리는 또다시 비행기 티켓을 사고 말았다. 머릿속에 두고 있던 싱가포르도 마음속에 품고 있던 러시아도 아닌 베트남행 비행기 티켓을,
무척 더웠던 또 다사다난했던 베트남 여행의 향기를 잊지 못해 그 해 겨울 우리는 또 갑작스럽게 강릉 여행을 다녀왔고, 또다시 언제 함께 떠날지는 모르겠다. 우리는 또 얼마나 먼 거리를 얼마나 오랜 기간 동안 떨어져 있을지는 모르지만 누군가 내게 가족을 제외하고 평생 옆에 두고 싶은 사람이 있냐고 묻는다면 한시도 주저 없이 그녀의 이름을 말할 자신이 있다.
뜻밖의 행복한 일들이 찾아와 한참을 기뻐하고 있던 날, 언니가 행복해서 행운이 따르는 거라며 나를 지지해주는, 내게 꿈을 물어 ‘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고 답하자 언니는 지금도 멋있으니 더 멋진 사람을 꿈으로 삼으라며 나를 더 멋진 사람으로 만들어 주려는, 언니와의 여행은 언제든 좋다며 나를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언니의 글은 사람의 마음을 울린다며 내 마음을 울리는, 언니가 찍어주는 사진이 제일 좋다며 내가 세상을 더 담고 싶게 만들어주는, 여행을 할 때면 물집이 한두 번 생기냐며 너스레를 떨어주는 그런 그녀가 내 곁에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든다.
어느 곳에서 어떤 여행을 했느냐가 중요하기보단 여행 그 후, 누군가와 함께 걷던 거리가 떠오르고, 거짓말처럼 맑은 하늘에 벼락이 쳐도, 함께 봤던 파란 하늘에 쏟아질 듯한 별들을 떠올리며 또 함께 미소 짓고, 스쿠터를 타고 달리다가 경찰에게 붙잡혀 스쿠터를 포기해 한참을 걸어도 발에 물집이 한두 번 나냐며 너스레를 떨며 웃을 수 있는 그런 소중한 추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누군가가 나의 곁에 있었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닐까,
함께 했던 여행의 끝에 항상 네가 돌아가면 나는 밥을 제대로 안 먹었고, 가방이 너무 무거워도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었고, 너무 무서워도 혼자였어. 베트남 여행 때 우리 슬리핑 버스 타기 전에 이야기했지? 이게 뭐가 위험하냐며 그럼 버스도 못 탄다고, 어느새 나보다 더 용감 해진 네가 없었다면 나는 어느 때처럼 그만큼만 강했을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여행에 매번 선물처럼 갑자기 나타나는 네 덕에 이 여행을 멈출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