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왕별희 디 오리지널'에 대한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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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라의 노래 '바람이 분다'에는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4월 1일 만우절, 내 추억 속 히어로 장국영이 영면에 든 날. 그가 출연한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을 극장에서 보고 난 후, 저는 늘 감탄하던 이 아포리즘에 이런 말을 덧붙이고 싶어 졌습니다. "추억은 분명 다르게 적히지만, 추억의 순간만큼은 영원하다"라는 말을요.
<패왕별희>를 처음 본 건 1994년 초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때만 해도 이 영화에 대해 아는 건 1993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라는 것, 경극을 소재로 한 영화라는 것, 장국영이 주연이라는 것, 이렇게 단 세 가지뿐이었습니다. 그중 제가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는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라는 네임 밸류에 있었어요. 지적 호기심과 허영심으로 가득하던 대학 새내기 시절이라, 유명 영화제 수상작이라면 무조건 보러 다녔으니까요.
지금 떠올려봐도 이 영화를 누구랑 봤는지, 또 어디서 봤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건 이 영화를 봤다는 사실과 이 영화로 인해 장국영이라는 배우를 사랑하게 됐다는 사실이에요. 그만큼 <패왕별희> 속 장국영의 연기는 완벽했고 압도적이었습니다. 예쁜 남자 배우를 싫어하던 제 취향을 뛰어넘을 만큼요.
<패왕별희>에 감동한 저는 <아비정전> <동사서독> <해피투게더> <금지옥엽> 등 장국영이 출연한 작품을 열심히 찾아봤습니다. '덕후'라고까진 할 수 없겠지만, 팬이라고 자처하기에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요. 그래서 2003년 4월 1일 전해진 그의 부고는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그 이전에도 또 이후에도 이만큼 충격적인 소식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장국영은 4월 1일이면 떠오르는 제 추억 속 히어로가 돼버렸습니다.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의 개봉 소식을 들은 건 3월 말이었어요. 영화 30주년을 기념해 재개봉을 한다는 기사를 접하게 된 거죠. 이미 본 영화였지만 자세한 줄거리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어요. 하지만 장국영의 압도적인 연기만큼은 기억하고 있었고, 그 연기를 다시 한번 보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습니다. 그렇게 목동 현대백화점에 위치한 메가박스 더 부티크에서 30년 만에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을 만나게 됐어요.
길다면 긴 3시간여의 러닝타임은 순식간에 흘러갔습니다. 경극 <패왕별희>를 모티브로 청데이(장국영)와 단샬로(장풍의), 주샨(공리), 이렇게 세 사람의 얽히고설킨 인연을 그린 이 영화는 중국 현대사의 흐름을 관통하고 있었습니다.
영화 초반의 에피소드 중 기억에 남는 건 두 가지였어요. 육손이로 태어난 청데이(아명 두지)를 베이징 경극학교에 들여보내기 위해 청데이의 손가락 하나를 끊어낸 두지 엄마의 에피소드와 "나는 원래 계집아이로 태어나서 사내아이가 아닌데"라는 대사를 "나는 원래 사내아이로 태어나서 계집아이가 아닌데"로 계속 바꿔 말하던 두지의 에피소드였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에피소드는 남성이지만 여성을 연기해야만 하는 경극 배우로의 입문을 상징하는 입사식(통과의례)의 형태로 다가왔습니다.
이후 <패왕별희>의 '우희'역으로 최고의 경극 배우가 된 청데이. 하지만 그의 인생은 파란만장 그 자체였어요. 평생을 함께하고 싶었던 단샬로와는 주샨의 등장을 계기로 계속 엇갈리기만 하고, 급변하는 정치적 상황은 경극 배우로서의 삶에도 위기를 초래합니다. 마음을 둘 데 없어 아편에 빠져들지만, 이는 몸을 망치고 무대를 망치는 지름길이었죠.
영화는 시작과 끝이 연결되는 수미상관 구조로 비극적 결말을 더욱 극대화합니다. 영화의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하는 칼의 상징도 인상적이에요. 역사 속 패왕(항우)과 우희의 결말이 그들을 연기했던 단샬로와 청데이의 결말과 중첩되니까요.
그렇게 30년 만에 다시 본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은 장국영이라는 배우에 대한 애정을 다시 한번 일깨워줬습니다. 이토록 아름답고 이토록 처연하며 이토록 완벽하게 청데이라는 인물을 재현할 수 있는 배우가 장국영 외에 또 누가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처음 봤을 땐 미처 깨닫지 못했던 청데이와 주샨의 미묘한 관계도 흥미로웠습니다. 연적이지만 한편으론 서로의 감정을 이해하는 친구 같은 느낌이었거든요. 게다가 당시 20대 후반이던 공리의 미모는 그야말로 빛이 나더군요. 리즈 시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연기는 더 말할 것도 없고요. 함께 영화를 봤던 친구와도 그 얘길 한참 했네요.
2024년 4월 1일,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 덕분에 저는 추억 속 제 히어로와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애틋했던 30년 전 추억의 한순간도요. 그리고 그 우연한 만남은 지금까지도 행복한 추억의 잔상을 드리우고 있습니다.
추억은 여전히 힘이 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