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졸한 복수의 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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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화를 내거나 분노하는 일이 잘 없는 편인데, 이상하게도 운전할 때는 사소한 일에 화가 나고 입에서 금세 욕이 튀어나오더라고요. 뭐, 욕 이래 봐야 '씨발', '개자식', 이 정도지만(이 정도 욕은 다들 하는 거 맞죠?), 바른말 고운 말을 써야 하는 작가에겐 천지개벽할(?) 일이란 생각을 가끔 해요.ㅠ.ㅠ 그런데 지난 월요일, 딸과 함께 대학병원 피부과에 갔을 때도 이런 욕이 튀어나왔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별일도 아니었어요. 제가 운전경력 10년 차인데도 운전이 서툴다 보니 주차하기 편한 경차를 주로 가지고 다니거든요. 이 날도 경차를 몰고 병원에 갔는데, 마침 경차 주차구역 하나가 비어 있더라고요. 그것도 엄청 좋은 자리예요. 그래서 '앗싸'를 외치며 후진주차를 하려는데, 옆의 중형 세단이 제 주차선을 넘어온 걸 뒤늦게 발견한 거예요. 가뜩이나 그리 넉넉지 않은 경차 주차구역을 큰 차가 넘어왔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화가 나면서 욕이 나오더라고요. '아무리 내 차가 작아도 그렇지 매너 없이 이게 무슨 짓이람?' 뭐, 이런 생각이 들었달까요? 그래서 복수심(?)에 운전석 쪽은 넓게, 보조석 쪽은 좁게 주차를 했죠. '흥, 어디 맛 좀 봐라' 하는 옹졸한 마음으로요.
그런데, 막상 진료를 마치고 주차장에 와보니 딸이 차에 타기가 엄청 불편한 상태인 거예요. 그도 그럴 것이 제 쪽(운전석)은 넓게 대고, 딸 쪽(보조석)은 엄청 좁게 댔으니까요(에효, 한 치 앞도 못 내다보는 이 근시안적인 사고... 도대체 어쩔?). 그래서 저는 딸에게 아까의 상황을 설명하며, "딸, 넌 차를 뺀 후에 타야겠다" 했죠. 그러곤 "난 왜 이렇게 사소한 일에 분노하면서 뒷일은 전혀 생각을 안 하는 걸까?"라고 스스로를 자책했답니다. 결과적으로 내 발등 내가 찍은 꼴이 됐으니까요. 그랬더니 딸이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로 저를 위로해 주더군요. 하지만 따뜻한(?) 위로는 잠시였어요. 바로 다음에 "엄마, 여기 공간이 생각보다 넓어. 차를 삐딱하게 대서 앞에만 조금 좁고 뒤로 갈수록 넓어진다. 그냥 엄마 뇌피셜에서만 공간이 좁다고 인식한 듯"이라고 '팩폭'을 날리더라고요. 그 말을 들은 저는 "나는 똑바로 댔는데, 옆 차가 삐딱하게 주차한 거야"라고 변명을 했죠. 그랬더니 딸이 "엄마 말이 맞긴 한데, 난 엄마한테 삐딱하게 댔다고 한 적 없는데... 엄마, 자격지심이 좀 있구나."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응, 맞아. 나 완전 자존감 낮고 자신감 없고 자격지심도 쩔어.ㅠ.ㅠ"라고 급 수긍했죠. 뭐,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고요. 그러자 딸이 "나도 그런데... 그래서 일부러 자신감 넘치는 척할 때가 많아. 아마 난 엄마 닮았나 보다"라며 공감하더군요.
사실 요즘 전 딸 앞에서 스스로를 높이기보다 가능한 한 낮추는 편이에요. 예전엔 딸한테조차 있어 보이려고 이런저런 '척'(똑똑한 척, 착한 척, 멋진 척 등등)을 많이 했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다 내려놓고 부족하고 모자란 모습을 많이 보여준달까요? 마치 남을 까기보다 자신을 까서 웃음을 주는 코미디언처럼요. 덕분에 우리의 공감지수는 계속 올라가는 추세랍니다. 역시 부모 자식 간에도 솔직한 게 최고인 것 같아요. 뭐, 우리 딸 취향엔 너무 잘난 엄마보다는 살짝 부족한 엄마가 맞는지도 모를 일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