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엄마의 컬래버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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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집은 매년 11월 김장을 합니다. 요리하는 것도 싫어하는 사람이 무슨 김장이냐고요? 거기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배추와 무를 가을 내내 텃밭에 가꿔 제때 수확한 후, 속노란 배추를 절여 깨끗이 씻고 실한 무를 채칼로 썰고 싱싱한 갓과 대파까지 준비해 차곡차곡 커다란 비닐봉투에 담아 딸과 사위에게 실어 보내는 게 친정엄마의 몫이라면, 찹쌀풀을 끓이고 맛 좋은 까나리액젓과 새우젓, 생새우와 굴을 미리 준비해 아들과 며느리가 실어온 무생채에 넣고 갖은 양념을 더해 김치속을 버무린 후 절인 배추 사이사이에 넣어 차곡차곡 김치통에 담는 건 시어머니의 몫이거든요. 한 마디로 20여 년간 이어진 두 엄마의 컬래버레이션이 겨우내 저희 집을 먹여 살리고 있는 셈입니다.
사실 제가 김장 날 하는 일은 별로 없어요. 김장에 쓸 생강과 마늘을 갈아놓고 쪽파를 까서 썰어두는 정도랄까요? 물론 요리를 싫어하는 제 평소 습관에 비하면 엄청난 분량의 일이지만, 배추를 절이고 무를 썰고 속을 버무리는 등의 김장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일이니 하는 일이 많다고 볼 순 없을 것 같네요. 하지만 김장 때마다 제 머릿속은 늘 여러 가지 생각들로 분주해지곤 한답니다. 특히 올해는 제 몸도 편치 않은 상황이라 '이번엔 김장을 하지 말까? 그냥 사먹는 게 편하지 않을까?'란 생각을 제일 많이 했어요. 게다가 두 엄마의 몸도 이미 많이 노쇠한 터라 김장 같은 큰 일을 감당하기엔 벅차시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했고요. 알고 보면 두 분 다 일흔 중반이 넘은 나이시거든요.
하지만 지난 토요일, 올해도 예외없이 김장을 했답니다. 아침 일찍 강화 친정집에 가서 손질해둔 배추와 무, 갓, 대파 등과 엄마가 미리 담가둔 알타리무김치, 동치미 등을 실어왔고요, 집에 돌아와선 시어머니, 형님(손윗시누이)과 함께 준비해둔 각종 재료를 더해 김치속을 버무렸어요. 이번에도 저는 두 엄마와 형님을 돕는 조연 역할이었고요. 달라진 게 있다면, 김장속, 절인 배추와 함께 먹을 수육을 준비했다는 것 정도겠네요. 마음도 살짝 달라졌어요. 예전엔 '귀찮은 일 빨리 해치우자' 정도의 마음이었다면, 올해는 '이것도 엄마들이 살아계실 때나 할 수 있는 일이야. 효도가 뭐 별건가? 엄마들이 하고 싶어하는 걸 하게 해주는 게 효도지'라는 마음으로 바뀌었달까요.
생각해보면 엄마들이라고 몸이 힘든 걸 모를 리는 없을 거예요. 내 몸이 힘들고 고달퍼도 내 자식들 입에 들어가는 음식, 내 손으로 맛나게 해주고 싶어하는 맘이시겠죠. 실제로 작년인가, 남편이 물색 모르고 "어머니들도 힘들고 너도 힘든데 김장은 뭐 하러 하니? 하지말고 그냥 사먹어" 했던 적이 있어요. 그래서 친정엄마한테 그 얘길 했더니 엄청 서운해하시더라고요. "내가 다 너희들 주려고 텃밭에 배추며 무며 심는 거지, 안 그러면 이걸 뭐하러 하겠니?"라고 하시면서요. 시어머니도 "사먹는 김치가 무슨 맛이 있겠니? 힘들어도 한겨울 먹을 음식인데 직접 담가 먹어야지"라고 한 마디 하셨고요. 마누라 힘들까 봐, 혹은 김장한 후에 힘들다면서 끙끙거리는 마누라가 보기 싫어서(?) 김장 하지 말라는 남편의 말도 이해는 가지만, '힘들어도 내 손으로 해먹이는 게 좋다'는 엄마들의 말이 가슴에 더 와닿아서 앞으로도 몇 년 동안은 매년 김장을 하게 될 것 같네요. 효도는 내 마음이 원하는 걸 하는 게 아니라,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부모님이 원하는 걸 하는 게 먼저니까요.
사족.
혹시나 궁금해하실까봐 적는 건데요, 저희 집 김장 풍경이 다른 집들과 조금 다른 건, 친정엄마가 집앞 텃밭에 농사를 지으셔서예요. 엄마가 직접 키운 배추와 무, 갓, 대파 등을 손질한 후 잘 포장해 전달해주시거든요. 집집마다 입맛이 다르니 김치 담그는 건 시어머니랑 같이 하라시면서요. 시어머니도 이런 엄마의 마음을 아시고, 매년 날짜를 맞춰 저희 집 김장을 담가 주시는 거고요. 덕분에 저는 신선하고 좋은 재료로 입맛에 딱 맞는 김장김치를 매년 먹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