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루틴'한 삶

-일상 속 사소한 행복

by 최혜정

20


최근 몸이 안 좋다는 이유로 몇 개의 일을 거절했습니다. 그만큼의 기회비용을 날린 셈이지요. 몹시 아쉬웠습니다. 재미도 있고 돈도 벌 수 있을 텐데 아깝다, 라는 생각도 당연히 했고요. 하지만 그 일을 하게 됐을 때의 제 모습을 떠올리니 안 하는 게 낫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뭔가 일이 뜻대로 안 되면 스스로를 엄청 괴롭히며 자책하는 타입이거든요. '내가 그때 왜 이걸 하겠다고 했을까? 내 역량은 왜 이것밖에 안 될까? 더 잘 쓰고 싶은데 왜 글이 이 모양일까?'... 기타 등등. 이제는 안 그래도 좋으련만 제 머릿속 내적 회로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돌아가니, 하겠다고 해놓고 스트레스받는 것보다는 그냥 안 하는 게 낫겠다는 쪽으로 가게 되는 거죠. 한 마디로 어쭙잖은 완벽주의 성향 때문에 늘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 타입인 셈입니다.



그런데요, 그때 했던 그 거절들 덕분에 이번 한 주가 너무 평화로운 거예요. 급한 일이 다 마무리되고, 클라이언트의 피드백만 기다리면 되는 아주 여유로운 상태가 몇 달만에 제 앞에 펼쳐지게 된 거죠.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오전 10시에 하는 요가 수업을, 그동안은 2~3번 가면 많이 가는 수준이었는데, 이번 주는 한 번도 빼먹지 않고 가고 있고요, 내내 내팽개쳐뒀던 청소며 빨래도 제때제때 하고 있답니다. 집안도 쾌적하고, 제 마음도 쾌적하고, 너무너무 행복한 상태인 거죠.


어제는 남편과 밤 산책을 나갔다가 개기월식도 봤답니다. 특히 개기월식과 천왕성 엄폐가 동시에 발생하는 건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라더라고요. '200년 만의 희귀한 현상'이라는 '블러드 문', 안갯속에 갇힌 듯 희미한 붉은 달이 정말 신비하고 예쁘더군요. 기왕 나간 김에 느릿느릿 걸어 집에서 1.5km 정도 떨어져 있는 스타벅스에 가서 커피도 테이크 아웃했어요. 돌아오는 길에는 이사온지 7년 만에 아파트 단지 내를 산책했고요.-음, 저는 늘 갔던 길만 가는 타입이라, 우리 집 아닌 곳은 일체 돌아볼 생각을 안 했거든요. 집 앞만 왔다 갔다 했지, 다른 동은 어떤지 궁금해한다거나 탐색해볼 생각은 1도 없는 타입이랄까요.-그런데 아침엔 요가 가고, 저녁엔 PT 혹은 헬스 하러 가고, 중간중간 집안일하는 이렇게 '루틴'한 삶이 이토록 행복할 줄이야... 역시 사람은 바쁜 날들에 지치고 시달려본 후에야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알게 되나 봅니다.




아침엔 거의 잠을 안 자다시피 한 아들이 친구와 만나 학교에 가겠다는 바람에 덩달아 일찍 집을 나섰네요. 아침마다 아들을 차로 학교까지 데려다주는 게 제 일과 중 하나거든요. 그런데 오늘따라 웬일인지 아들 기분이 엄청 좋아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농담 겸 진담 겸 "오늘은 웬일이야? 교복을 다 입었네"라며 말을 걸었죠.-아들 학교는 교복을 안 입어도 별로 혼내질 않나 봐요. 그동안은 매번 사복을 입고 등교를...-그랬더니 "응, 오늘 축제 리허설 날이라서"라는 답이 돌아오는 겁니다. 지난번 잠깐 축제 예선무대 얘길 한 적이 있는데, 앰프랑 마이크 상태가 별로라서 제 실력을 발휘 못했고... 어쩌고 저쩌고, 이러길래 똑 떨어진 줄 알았거든요. 그래서 "너, 거기 붙었어? 난 네가 말이 없길래 떨어진 줄 알았지" 했죠. 그랬더니 아들이 "엄마, 아무리 음향 상태가 별로라도 내가 떨어질 일은 없지. 엄마는 어떻게 아들이 예선에서 떨어진단 생각을 해?"라며 되레 어이없어하는 겁니다. 순간 말문이 막힌 저는 "나도 그럴 리 없단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서 물어보질 못했지"라고 변명을... 어쨌거나 학교 가면 공부는 안 하고 매번 잠이나 자니 큰일이다 했는데, 그나마 축제라도 참가하게 돼 다행이다 싶더군요. 자기가 잘하는 걸 보여줄 수 있으니 아들의 자존감을 높이는 데도 도움이 될 테고요. 평소엔 라이프스타일이 안 맞아 얼굴 보기도 힘들던 아들과 오래간만에 대화도 나누고... 오랜만에 즐거운 아침의 시작이었단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이 모든 즐겁고 행복한 일상이 얼마 전 일을 거절한 덕분이려니 생각하니, 절로 스스로를 칭찬하게 되었다는... 가끔은 일이 없는 불안한 삶도, '루틴'하지만 행복한 일상으로 치환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된 하루였습니다.

작가의 이전글누구에게 좋은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