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속 숨겨진 마음, 그리고 회복
삼남매를 키우는 부모의 저녁은 가끔 폭풍우 속 항해를 한다. 어제 저녁은 그중에서도 유난히 거센 파도가 밀려온 날이었다.
퇴근길,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며 서둘러 도착한 돈가스집. 도미노처럼 후두염에 모두 걸린 삼남매가 외식을 하자는 요구에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식당에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들려오는 아이들의 울음소리와 당황한 아내의 눈빛에 순간적으로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일단 가장 크게 울고 있던 둘째를 안고 식당 밖으로 나왔다. 곧이어 셋째도 "나도 안아줘!"를 외치며 따라 나온다. 다행히 아직은 다섯 살 남매둥이를 동시에 안아 들 수 있을 만큼 팔이 견뎌준다. 둥이를 번쩍 들어 눈을 마주친다.
서로를 밀쳐내며 울던 아이들이 사랑하는 만큼 꼭 안아주는 내 품에서 조용히 숨을 골랐다. 팔이 저려올 때쯤 아이들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그렇게 속상했어?”
셋째는 울먹이며 말했다. "햄버거 먹고 싶었는데…"
둘째는 삐죽이며 소리쳤다. "재미있는 거 보여줘!"
두 아이의 욕구는 달랐다. 셋째는 단순히 먹고 싶은 걸 못 먹어서 속상했고, 둘째는 그 상황을 이용해 자신이 원하는 걸 얻어내려 했다. 둘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울면 스마트폰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첫째가 초등학생이 되면서 우리 가족은 케이블 TV를 끊었다. 그 이후로 스마트폰과 태블릿은 아이들에게 더 특별한 유혹이 되었다. 둘째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상황을 협상 카드로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울음을 그치고 식당으로 돌아와 둘째와 협상을 하는데 얼굴에 상처밴드 폼을 큼지막하게 2개나 붙이고 있었다. 이유인즉슨 횡단보도에서 1호 다온이가 킥보드를 출발하는데 2호가 뛰어들어 부딪쳐 넘어진 것이었다. 속상해하는 엄마 말에 기가 죽은 1호는 조용히 밥만 먹고 있었다. 이리저리 우리 가족들 힘든 날이었구나.
나는 빠르게 판단했다. 둘째에겐 식사 후 햄버거를 사주겠다고 약속했고, 셋째에겐 밥을 잘 먹으면 유튜브 영상을 잠깐 보여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1호에겐 어서 밥을 먹으라며 2호와 있었던 일은 언급하지 않았다. 1호도 속상할 테니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과의 협상은 늘 즉흥적이지만, 그 안에 신뢰가 들어 있다. 그렇게 우리는 폭풍 같은 식사를 겨우 마쳤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거짓말처럼 평화로웠다. 봄기운이 물씬 느껴지는 거리, 벚꽃과 개나리, 유달리 하얗고 작은 이름 모를 봄꽃을 보며 삼남매는 다시 미소를 머금었다. 손을 잡고 걷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잠시나마 아버지로서의 균형을 되찾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평화도 잠자리에서 다시 깨졌다. "아빠 옆에서 내가 잘 거야!"를 외치며 아이들이 또다시 다투기 시작했다. 아마도 저녁부터 서로 경쟁하듯 울었던 감정이 2차전에 돌입했나 보다. 결국 둘째는 싸우다 지쳐 잠들었고, 셋째는 엄마 품으로 향했다. 첫째는 승리의 기쁨보다 찜찜한 기분을 훌쩍이며 내 옆에 누워 조용히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어제의 소란은 마치 없었던 일처럼 활기가 넘친다. 어떤 행동, 생각, 감정이 해소되지 않았다면 시간이 지나고 다시 돌아봐야 한다는 게 내 원칙이다. 조심스럽게 1호 다온이 눈을 마주치며 말을 꺼냈다. 횡단보도에서는 좌우앞뒤를 보고 조심히 건너야 해. 그러려면 킥보드를 타지 말고 끌고 가야 해. 다행스럽게도 첫째는 변명도 하지 않고 쉬이 횡단보도에서 킥보드를 타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둘째와 셋째는 환하게 웃으며 아침을 먹는다. 아직 어린 둥이들에게는 아무 말하지 않았다. 벌써 잊고 서로 저렇게 웃으며 밥을 먹고 있으니 별 걱정은 없다. 아이들에게는 회복력이란 이름의 특별한 능력이 있다. 어제의 감정은 오늘의 장난에 묻혀 사라진다.
그런 하루를 지나며, 나는 부모로서 늘 떠올리는 2가지를 생각한다.
하나는 ‘상황의 환기’다. 아이들의 감정은 때로 그 상황 자체가 만든 것이다. 좋아하는 장소, 음식, 혹은 외부의 공기 하나로도 감정은 바뀔 수 있다. 심리학에서 말하듯, 행동은 성격(특성: trait))과 상황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다. 즉, 상황을 바꾸면 아이의 행동도 바뀔 수 있다. 그래서 이런 갈등에는 상황을 빨리 파악하고 환경을 바꾸는 것도 좋은 전략이 될 수 있다.
또 하나는 ‘소통’이다. 울음 너머의 속마음(욕구, 바램)을 들여다보는 일. 아이가 떼를 쓰고 울 때, 그 안에 감춰진 진짜 마음은 애정이고 이해받고 싶은 욕구이다. 그걸 끌어내려면, 말보다 마음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감이 우선돼야 한다. 공감이라는 지지대는 울음 뒤에 아이가 진짜 원하는 것을 알게 해준다. 그 욕구를 알아채고 다독여 줄 때 참 만남이 일어난다.
삼남매가 커갈수록 이런 순간들은 더 자주, 더 다채롭게 찾아올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빠르게 상황을 읽고, 환기를 시키고, 가능한 한 속마음을 공감하는 대화를 시도하며, 아이들과 함께 균형을 찾아가려 한다.
폭풍 같은 하루 끝에, 결국 남는 건 ‘우리가 함께’였다는 사실이다. 불완전하고 혼란스러운 하루였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조금씩 함께 자라고 있다. 각기 다른 욕구를 서로 존중하고 알아주면서 그렇게 자라고 있다.
어떤 갈등도 서로 다시 웃을 수 있다는 믿음이 커져가는것 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삼남매와 함께 하는 삶은 다시 어른이 되는 과정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