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은 결코 거창한 덕성이 아니다. 칸트가 말하는 정언명령의 실천이 아니다.
삶의 일상적 체험이서 부닥치는 작은 감성적 판단에 관한 것이다.
칸트가 말하는 정언명령은 보편적 원리로서 우리에게 연역적으로 전제되는 것이 아니라,
"일선"으로부터 스스로 구성해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칸트가 정할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정할 문제이다.
체험 속에서 우러나오지 않은 원리는 원리의 자격이 없다.
살면서 '내게 그럴만한 자격이 있나?'라는 질문, 자기 검열에 빠질 때가 있다.
지금 내 마음이 어떤지, 내 몸의 현실이 어떤지 정직하게 바라보기보다
그래야 한다는 외부의 시선이나, 책임, 당위나 '~다움'을 스스로에게 짐지운다.
교사답게, 학생답게, 한몸살이 지체답게, 언니답게, 동생답게...
그 자격과 내용도 제한된 경험 안에서 세뇌된 고정된 상일 때가 대부분이었다. 허깨비였다.
그랬어야 했는데, 그러하지 못했다는 후회나 자책이 아니라
그저 체험 속에서 우러나오지 못해 놓쳤던, 그래, 그저 그랬구나, 그랬었구나, 하며 바라볼 힘이 있다면 좋겠다.
칸트가 정할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정할 문제다.
천지가 인격적인 마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인격성은 오직 만물을 창조하는 생명력에 있을 뿐이다.
천지는 이 마음을 가지고서 만물에 두루 미친다.
사람은 이 마음을 얻어 사람의 마음을 심고,
물이 이 마음을 얻으면 그것이 물의 마음이 되고,
초목금수가 이 마음을 얻으면 그것이 초목금수의 마음이 된다.
이 모든 마음이 알고보면 단 하나의 천지의 마음인 것이다.
하늘 땅 살이.
두루 미치는 마음, 연결된 마음들, 결국 단 하나의 천지의 마음이다.
하늘땅살이 하며 씨앗 작물들과 마음 나누는 학생들의 날적이가 떠올랐다.
'넌 이렇게 작은데, 나중에 어떻게 그렇게 크니? 네가 참 신기해.'
'아욱아, 윗니가 올라온 모습이 신기하다. 너의 그런 모습을 잘 간직해.'
상추가 아이 같고, 아이가 꼭 아욱 같다.
나도 그 마음과 연결되어 살고 싶다.
<중용, 인간의맛 / 2-14장> 2019.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