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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NP Oct 17. 2017

별빛에 취해 추억을 더듬다.

강릉 안반데기


느지막이 집을 나섰습니다. 별을 보러 떠나는 길입니다. 목적지는 강원도 강릉의 작은 마을 대기리입니다. 안반데기로 더 잘 알려진 대기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마을입니다. ‘안반’은 떡메로 반죽을 칠 때 쓰는 우묵하고 넓은 통나무 받침을, ‘데기’는 평평한 땅을 가리키는 강릉 사투리입니다. 해발 1,100m에 자리한 안반데기는 우리나라 최대 고랭지 채소 재배지역이기도 한데요. 이즈음 거두는 대기리의 씨알 굵은 고랭지 배추는 아삭한 식감이 일품입니다. 잔디처럼 곱게 펼쳐진 고랭지 배추밭은 사진가들이 탐내는 최고의 풍경이기도 합니다.


저는 오늘 이 아름다운 풍경에 묻혀 원 없이 별빛에 취해볼 생각입니다. 준비도 단단히 했습니다. 달력을 살펴 그믐이 언제인지 확인했고, ‘백로’를 훌쩍 넘긴 절기를 감안해 두툼한 외투도 챙겼습니다. 운이 좋다면, 은하수를 보게 될 지도 모르겠네요. 차창 밖으로 보이는 투명한 가을하늘에 기대를 걸어 봅니다.


한산한 영동고속도로와 헤어진 건 강릉이 아닌 대관령 나들목에서입니다. 안반데기는 행정구역 상 강릉시에 속하지만 평창을 가로질러 가는 길이 훨씬 수월합니다. 강릉과 평창이 경계를 이루는 고루포기산(1,238m)과 옥녀봉(1,146m) 사이에 자리한 탓이지요.



영동고속도로 대관령 나들목에서 알펜시아리조트까지는 길이 널찍하니 참 좋습니다. 내년 2월이면 이곳에서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을 볼 수 있을 테지요. 멀리 바라보이는 스키점프대가 참 멋지네요. 산뜻한 도로는 용평리조트 인근을 지나면서 모습이 많이 바뀝니다. 왕복 4차선 도로는 그 폭이 반으로 줄고, 그 흔한 가로등 하나 보이지 않습니다. 뭐랄까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 온 것 같은 기분이랄까요. 안반데기에 이르기 위해 반드시 올라야 하는 피덕령 고갯길은 그 중에서도 백미랄 수 있습니다. 3km 가까이 이어지는 이 길은 차 두 대가 교행하기도 버거울 만큼 폭이 좁고, 또 가팔라 운전에 상당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안반데기에서 별 보기 좋은 곳은 멍에전망대와 일출전망대입니다. 두 곳 전망대는 대기리 마을회관을 기준으로 남쪽과 북쪽 언덕에 각각 위치합니다. 일단, 멍에전망대로 길을 잡습니다. 아직 어둠이 내리지 않은 시간인데도 멍에전망대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네요. 아이 손잡고 온 젊은 부부도 보이고,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며 촬영 포인트를 확인하는 사진가도 여럿입니다. 어슴푸레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지만 하늘은 여전히 푸른빛을 머금고 있습니다. 아마도 조금은 더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봐야 할 것 같습니다.



기다림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설렘과 지루함이 함께하니까요. 하지만 이곳에서라면 지루함 보다는 설렘에 더 무게를 실어주어도 될 듯합니다. 솔직히 지루할 겨를이 없습니다. 전망대 위 아담한 정자에 앉아 바라보는 풍경만으로도 한두 시간은 훌쩍 지나가 버리니까요. 빙글빙글 돌아가는 풍력발전기도, 그 너머로 보이는 강릉 앞바다도 참 아름답습니다. 물론 드넓은 배추밭도 이곳에선 놓칠 수 없는 풍경이지요. 이제 막 수확이 시작돼 듬성듬성 붉은 땅이 드러난 건 조금 아쉽지만요.



기다림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산촌의 밤이 생각보다 일찍 찾아든 탓입니다. 완만한 능선 위로 고은 오렌지 빛 노을이 내려앉으면 이곳의 밤은 시작됩니다. 분주히 오가던 배추 실은 트럭의 붉은 미등도 그즈음 하나둘 자취를 감춥니다.


순식간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릴 것 같습니다. 사방이 칠흑 같은 어둠으로 싸인 건 정말 한순간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이내 별들이 돋기 시작했습니다. 머리 위로 국자 모양의 북두칠성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 옆으로 북극성도 반짝입니다. 알파벳 ‘W’ 자 모양의 카시오페아도 또렷히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네요. 수면 위로 떠오르는 물방울처럼 돋은 별들은 그렇게 어둠이 찾아왔던 것보다 빠른 속도로 밤하늘을 채웁니다. 하얀색 물감을 검은 도화지 위에 뿌릴 때처럼 말이지요. 욕심만 앞선 눈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초점을 맞춰야 할지 안절부절했던 건 그래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녁 8시가 조금 넘었을까요. 마침내 멍에전망대 위로 은하수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희뿌연 구름처럼, 가늘고 길게 이어진 은하수는 사실 육안으로 확인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천하의 안반데기라도 빛 공해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니 흐릿한 구름처럼 하늘에 떠있는 은하수를 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는 정도의 노력은 드려야 합니다. 그래도, 그 정도 노력으로 은하수를 볼 수 있다는 건 분명 행운입니다. 도시에서라면 아무리 노력해도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그러고 보니 우리는 별을 보기 위해, 은하수를 보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네요. 서글프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럼에도 이 시간이 감사한 건 그 정도의 시간과 노력으로 영원히 잊힐 수 있었던 추억과 마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할머니 무릎 베고 누워 밤하늘을 바라보던 그 아련한 추억 말입니다. 별똥별 하나가 오래 전 그날처럼 은하수 위로 긴 꼬리를 남기며 흘러가네요.  



강릉 바다에서 밀려온 습한 구름이 밤하늘 별들을 하나둘씩 지워나갑니다. 새벽 3시가 훌쩍 넘은 시간입니다. 은하수도 더 이상 보이지 않네요. 별들이 모두 사라졌으니 집으로 돌아가는 게 맞는데, 차마 발걸음을 돌릴 수가 없네요. 왜냐구요? 아직 제대로 된 별을 보지 못했으니까요. 원 없이 별을 보고나서 별을 보지 못했다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의아하시죠?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안반데기에서 아름다운 건 별과 은하수 뿐이 아닙니다. 사실 안반데기는 별이나 은하수보다 일출로 먼저 이름을 알린 곳이니까요. 그러니, 기왕 어려운 걸음하셨다면 일출도 꼭 한번 보고 돌아가셨으면 합니다. 앞서 제대로 된 별을 보지 못했다 말씀드린 것도 일출을 두고 한 말입니다. 천문학에서 별은 ‘스스로 빛을 발하는 항성’으로 정의하고 있으니 태양이야 말로 진정한 별인 셈이지요. 말장난 같지만, 수줍은 새색시 마냥 산머리 위로 살포시 고개 내민 일출과 마주하고 나면 ‘아, 기다리기를 잘 했구나’ 싶을 겁니다. 대기리마을에는 운유촌이란 예쁜 이름의 민박집이 있으니 밤새 추위에 떨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글 사진 정철훈(여행작가)




<여행정보>

안반데기

주소 : 강원도 강릉시 왕산면 안반덕길 428

문의 : 033-655-5119


주변 음식점

-황태회관 : 황태요리 / 평창군 대관령면 눈마을길 19 / 033-335-5795

-대관령숯불회관 : 한우 / 평창군 대관령면 횡계2길 3 / 033-335-5360

-납작식당 : 오삼불고기 / 평창군 대관령면 대관령로 113 / 033-335-5477


숙소

-운유촌 숙소 : 강릉시 왕산면 안반데기길 428 / 033-655-5119, 010-9588-5520/ www.안반데기.kr/main

-대관령품안에펜션 : 평창군 대관령면 꽃밭양지길 372 / 033-335-0830 / http://www.dkrpension830.com

-용평그린피아콘도(용평리조트) : 평창군 대관령면 올림픽로 715 / 033-335-5757 / http://www.yongpyong.co.kr/kor/index.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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