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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NP Aug 14. 2015

여행, 다시 쓰기 -삼척 댓재-

백두대간을 닮은 그들의 삶 속으로...


동해를 따라 흘러내린 백두대간

그 산을 닮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 삼척


삼척땅에 들어서면 모든 교통 표지판이 환선굴(幻仙窟)을 가리키고 있다. 삼척 시내에서 38번 국도를 타고 태백으로 달리다 보면 아치형으로 세워진 커다란 환선굴 입간판이 막아선다. 이곳에서 우회전해 무릉천을 따라가다 보면 덕항산, 양태봉, 문무산, 지각산 등 태백산맥의 준령들이 병풍처럼 사방을 감싼다. 입춘도 우수도 이미 저만치 지났건만 흰 눈을 이고 있는 봉우리들은 아직껏 겨울옷을 채 벗어버리지 못했다. 길게 이어진 길은 백두대간의 분수령을 이루는 덕항산(1,070m) 기슭의 대이리 군립공원 초입에서 끝이 난다.                                                                                                  


대이리 군립공원. 말이 군립공원이지 국립공원 못지않은 규모다. 넓은 주차장 맞은편으로는 정갈하게 복원해 놓은 너와집과 굴피집도 보인다. 민속마을이라 이름 붙여진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양새를 하고 있지만 이곳에선 느낌이 조금 다르다. 적절한 비유일지 모르지만 수업이 시작되기 전 예습을 위해 잠시 펼쳐 든 교과서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복원해 놓은 너와집과 굴피집을 오가며 공부하는 기분으로 꼼꼼히 살펴본다. 안내문에 적힌 내용도 찬찬히 읽고 또 읽어 본다.

너와집과 굴피집은 그 외관과 구조에서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소나무 판자를 이용해 지붕을 이었는지, 아니면 참나무 껍질로 지붕을 이었는지에 따라 그 이름을 달리할 뿐이다. 소나무 판자를 이고 앉은 집을 너와집, 참나무 껍질을 이고 앉은 집을 굴피집이라 부른다. 이곳 대이리에는 10여 년 전 만해도 20여 채에 이르는 너와집과 굴피집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대이리 동굴지대가 군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하나 둘 씩 사라지거나 개량되었고, 지금은 중요 민속자료로 지정된 너와집과 굴피집 한 채씩만이 그 명맥을 잇고 있다. 너와집 한 채와 굴피집 한 채. 왠지 구색을 맞춰놓은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순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나마 남아있다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예습이 끝났으니 이젠 본 수업을 시작할 시간이다.

정감록에 기록된 십승지
대이리

대이리 군립공원 매표소를 지나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급할 게 없다. 저 멀리 덕항산의 완만한 능선을 배경삼아 우뚝 솟은 촛대봉이 시선을 끈다. 남성미 물씬 풍기는 그 모습이 자못 웅장하다. 지각산과 양태봉의 모습도 늠름하긴 매한가지다.

대이리 군립관광지를 찾는 이들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그 첫 번째는 동양 최대의 석회동굴이라는 환선굴을 보기 위해서고, 두 번째는 백두대간의 장쾌함을 잇는 덕항산 산행을 위해서다. 하지만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한다면, 그 속에서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엿보는 것도 빼놓을 수 다. 산책로를 따라 즐 식당과 민박집 그리고 기념품 가게들. 얼핏 봐서는 여느 관광지와 별반 다를 게 없는 풍경이지만 그 속내를 찬찬히 들여다면 오랜 세월 자연과 더불어 살아온 이들의 순박한 삶이 자연스럽게 읽힌다. 조선시대 예언서인 정감록 십승지 중 하나로  있는 오마을. 6․25 전쟁 때는 군인 한 명 보지 못하고 총성 한 번 울린 적 없는 곳이 바로 이곳 대이리 산촌마을이기 때문이다.


“이 집이요?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500년은 족히 되었을 겁니다. 저희 아버지를 거쳐 저희 형님까지 벌써 13대째 이 집에서 생활을 했으니까요.”


길가에 세워놓은 안내표시가 없었다면 아마도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를 너와집에서 만난 이진우 씨의 말이다. 대이리에서 유일하게 사람이 살고 있는 바로 그 너와집이다. 경기도 성남에서 생활한다는 이진우 씨는 잠시 시간을 내 형님 댁에 들른 참이라고 했다.


“저도 이 집에서 나고 자랐지요. 제 어린 시절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집입니다. 제 기억으로는 이 집 주위로 제법 많은 너와집과 굴피집이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제부턴가 하나 둘 사라져 버렸어요. 장사를 위해 개량한 곳도 몇 곳 되는 것 같고. 그러다 보니 이제는 이 집만이 이 일대에서 사람이 살고 있는 유일한 너와집이에요. 3년 전 형님이 돌아가신 후로는 형수님과 두 조카만 남아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점은 아마도 저희 대가 이 집에서 살아가는 마지막 세대가 아닐까 하는 점입니다. 저 역시도 이렇게 가끔 들러보는 일 외에 형수와 조카들에게 달리 해줄 일이 없으니까요.”



사실 이 너와집에서 생활하는 이연학 할머니와 두 아들은 모두 건강이 좋지 않다. 그렇다 보니 생활도 그리 넉넉해 보이지 않는다. 아니 솔직히 궁핍해 보인다고 해야 옳은 표현일는지 모른다. 그래도 식당을 운영하는 작은 아버지 댁으로 일을 나가는 큰아들과 군립공원 내에서 소소한 일을 맡아보는 작은 아들이 대견하기만 하다는 이연학 할머니는 내 한몸 편히 누일 수 있는 집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며 사람 좋게 웃어 보인다.

짧은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에도 할머니는 잠시도 몸을 가만히 두질 못한다. 널어놓은 빨래를 만져보고 장작을 챙겨와 군불을 살핀다. 한평생 험준한 두메산골에서 살면서 자연스레 몸에 밴 습관 때문이다.

아궁이에 군불을 지피던 이연학 할머니의 손놀림이 바빠진 것은 그즈음이다. 일 나갔던 자식들이 점심을 먹으러 집으로 돌아올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서둘러 설거지를 마치고 밥상을 차리는 할머니의 모습이 여간 정성스러운 게 아니다. 물기 없는 밥상을 몇 번이고 다시 마른행주로 훔치고 숟가락과 젓가락도 일일이 짝을 맞춰 가지런히 밥상에 올린다. 김치와 무말랭이 그리고 아궁이에서 금방 데운 김치찌개가 전부인 단출한 밥상이지만 그 정성만은 어느 진수성찬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할머니의 점심준비는 비단 두 아들의 밥상을 보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집안 곳곳에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앉은 일곱 마리나 되는 고양이의 점심을 챙기는 것도 할머니에겐 빼놓을 수 없는 일과다. 자식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녀석들이고 보니 그 정성도 자식 대하는 것 이상이다.


“야들 없으면 내가 웃을 일이 없어. 어딜 가나 졸졸 따라다니는 게 영락없는 자식새끼라니까. 저기 검둥이 있지? 저 녀석이 생긴 건 저래도 제일 곰살맞아. 옆에 착하고 달라붙어서 얼마나 애교를 불리는지.”


할머니의 얘기를 알아듣기라고 한 듯 하나 둘 모여든 고양이들이 어느새 부엌 한편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다. 한 녀석 한 녀석 맞춤을 하던 할머니가 뒷마당에서 두 마리를 더 데리고 온다. 아마도 따뜻한 봄볕에 낮잠을 즐기다 때를 놓친 녀석들일 터다.     


“이 나이에 더 바랄 게 뭐가 있겠냐 마는 우리 아들 놈들 좋은 짝 만나 살림 나는 거, 그것만 봤으면 좋겠는데. 요즘 같은 세상에 어느 처자가 이런 산골로 시집을 오려고 할는지.”


식사를 마치고 다시 각자의 일터로 발걸음을 옮기는 두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할머니가 무심코 뱉은 말이다. 사람 좋게만 보이던 할머니의 얼굴에 잠시 근심이 서린다. 하지만 그도 잠시, 볕이 좋다며 금세 밝아진 표정으로 부엌을 나서는 할머니 곁엔 어김없이 검둥이가 따라붙는다. 있는 듯 없는 듯 불평도 불만도 없이 그렇게 자연에 순응하면 살아가는 모습이 500년을 훌쩍 넘긴 너와집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산을 닮은 사람들

덕항산과 지각산을 거친 백두대간 줄기는 큰재와 황장산을 거쳐 댓재(820m)를 지나 두타산(1,353m)으로 이어진다. 댓재는 삼척시 미로면과 하장면을 연결하는 고개로 대이리 군립공원에서 38번 국도를 타고 다시 삼척방면으로 거슬러 나온 뒤, 하거노 삼거리에서 424번 지방도로를 이용해 올라야 한다. 이 고갯길은 밑이 안 보일 정도로 험한 지형으로 소문난 곳. 그렇게 힘겹게 오른 댓재와 두타산을 이어주는 곳에 자리한 마을이 바로 삼척시 하장면 번천리 마을이다.


“우리 마을에는 큰 개울이 하나 있지. 마을을 가로지르는 큰 개울인데, 그래서 아마 번천(番川)이라고 이름 붙여진 게 아닌가 싶어. 예전에는 아시내(鴉柴川)라고 부르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그냥 번천이라고 불러. 이 물이 얼마나 깨끗한지 우리는 일하다 갈증 나면 개울물을 그냥 먹어 그래도 아무 탈이 없어. 개울이 아니라 약수지 약수. 이렇게 살기 좋은 마을인데 왜 들 그리도 떠나가는지. 여기가 번천리 1반이고, 요 아래 번천분교장이 있는 곳이 2반인데, 예전에는 이 번천리 1반에만 30여 세대가 살았거든. 지금? 지금은 세 가구밖에 안 남았어. 농번기가 되면 농사지으러 잠시 들어오는 사람이 있기는 한데, 여기서 온전히 뿌리 내리고 사는 집은 세  집뿐이야.”


장작도 구할 겸 소일 삼아 집을 나섰다는 한봉수 할아버지는 일흔을 넘긴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정한 모습이다. 톱질을 하는 손아귀에서도 젊은 사람 못지않은 힘이 느껴진다. 언제 잘라냈는지 길가에는 이미 아름드리 나뭇가지가 가득 이다. 겨울도 다 지났는데 무슨 장작을 이리도 많이 준비하시느냐고 물으니, 의외의 대답이 돌아온다.


“가지가 이렇게 무성하니 햇빛이 들지 않아서 길가의 눈이 잘 녹질 않아. 우리야 상관없지만 젊은이처럼 우리 마을을 찾는 외지 사람들이 가끔 있거든.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눈 쌓인 길에서 낭패를 보면 얼마나 기분이 안 좋겠어. 그래서 이렇게 시간 있을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잘라 내는 거야. 그래야 내 마음도 편하고.”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 했던가. 넉넉한 산의 품에 안겨 살아온 세월만큼 할아버도 그 산 모습을 그대로 닮아가고 있는 모양이다.

번천리에 유일하게 하나 남은 황태덕장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잘 말린 명태를 걷어내는 작업이 한창이다. 아직 아침 햇살이 번처리 마을에 채 닿지도 않은 시간이지만 명태를 걷어내는 작업자의 손놀림은 분주하기만 하다. 기온이 높아져 땅이 녹으면 더 이상 작업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덕장에서의 작업은 대부분 이른 아침에 시작에 정오가 되기 전  마무리된다.


“번천리요? 여기가 명태 말리기에는 명당이에요. 기본적으로 고지가 높으니 날씨가 춥고 일교차도 심하잖아요. 그리고 바다가 가까운데다 두타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이 마을을 빙 두르고 있으니 겨울에는 눈도 많이 내리거든요. 명태 말리는데 이만한 곳도 없어요.”


10년째 이곳 덕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이종형 씨의 분주한 손놀림이 잠시 여유를 찾았다. 작업하는 동안 참았던 담배도 그제야 달게 한 대 피워 문다. 함께 작업 나온 이광희 씨가 이 정도면 됐다는 신호를 보내온 탓이다. 짧은 휴식을 마지막으로 그들의 아침 작업도  마무리됐다. 잠시도 쉬지 않고 아침 내 실어 나른 그들의 노력은 꼭 그만큼의 풍성함으로 그 자리를 채워놓을 것이다. 아침햇살을 받으며 검은 실루엣만을 남기며 저 멀리 사라져 가는 그들의 모습이 그래서 더 당당해 보였는지 모른다.  

삼척은 참 독특한 도시다. 동해를 끼고 있지만 바닷가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으니 말이다. 아마도 해안과 거의 맞닿으며 달리는 험준한 백두대간의 줄기가 도시를 에워싸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댓재를 거슬러 내려오는 길, 저 멀리 동해의 푸른 물결과 삼척 시내가 한 눈에 담긴다. 산과 바다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곳. 그곳에는 여전히 자연에 순응하며 산을 닮아가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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