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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NP Aug 17. 2015

여행, 다시 쓰기 -정선 두문동-

삶의 희망도 아픔도 오롯이 품어준 하늘의 땅, 함백산

눈이 내린다. 많은 양은 아니지만 모른 척 잠자리에 들기에는 내리는 모양새가 너무 예쁘다. 무작정 카메라를 챙겨 밖으로 나선다. 직업병이라고 해도 좋고, 나이 값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새벽 2시. 나의 잠 못 이룬 하루는 그렇게 시작됐다.


강원도 정선군의 최남단에 위치한 고한읍은 백두산에서 남으로 힘차게 뻗어 나온 백두대간 줄기가 태백산을 거쳐 남동쪽으로 방향을 트는 함백산에 기대어 생겨난 마을이다. 한때 석탄산업의 메카로 불리던 이곳이 몇 년 사이 새로운 변화의 물결에 휩싸였다.

강원랜드와 하나원 스키장.
조용했던 산간마을과는 도무지 어울릴 수 없을 것만 같은 이 거대한 두 물결은 마을의 모습을 많이도 바꾸어 놓았다. 아니 마을의  모습뿐 아니라 그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이들의 생활에도 적잖이 영향을 미쳤으리라.


한때 이곳 고한읍 사람들에게 함백산은 희망이었다. ‘민족의 영산’이니 ‘태백산의 지붕’이니 하는 허울 좋은 얘기 때문만은 아니다. 스스로를 ‘막장인생’이라 자조하며 하루하루 힘겨운 생활을 이어가는 그들에게 삶의 터전이 되어준 것이 바로 함백산이었기 때문이다.


잠시 걸음을 멈춘다. 또 다른 세상으로 들어서는 문이 보인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아직까지도 들고나는 차량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도로변을 따라 길게 주차된 차량의 행렬과 밤새 꺼지지 않는 전당포 간판 그리고 주위와 융화되지 못한 채 삐죽이 올라선 5층짜리 현대식 모텔의 모습이 낯설게 다가온다. 낮은 슬레이트 지붕 뒤로 보이는 현대식 고층 아파트의 모습도 낯설기는 마찬가지다. 누구도 세월의 흐름을 막을 순 없다. 세월의 흐름만큼 세상도 변하기 마련이다. 이곳인들 어찌 세월의 흐름을 거스를 수 있었겠으며, 변화를 거부할 수 있었겠는가. 이기적인 욕심일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이곳만은 옛 모습을 간직했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답답하게 가슴 한구석을 짓누르는 씁쓸한 기분이 쉬이 가시질 않는다. 

짧은 상념을 뒤로 하고 다시 어둠이 짙게 깔린 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 어디로 가서 누구를 만나고 어디에서 무엇을 찍어야 한다는 목적은 애당초 정하지 않았기에 한발 한발 내딛는 걸음걸이도 거침이 없다. 그냥 길을 따라 앞으로 나갈 뿐이다. 

그치지 않을 것 같던 눈발도 어느새 조금씩 잦아들고 있다. 아쉬움이 밀려온다. 조금만 더 내려줬으면 싶은데, 마음과는 달리 한번 잦아들기 시작한 눈은 언제 내렸냐는 듯 순식간에 자취를 감춰버린다. 허전하다. 오랜 시간 함께하던 길동무와 헤어진 듯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다. 그렇게 눈이 그치고 나니 어디로 가야 할지 영 방향이 잡히질 않는다. 딱히 목적지를 정하고 나선 것도 아닌데 망망대해에 홀로 떠있는 배처럼 도무지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는다. 그렇게 우두커니 서서 한참 동안 애꿎은 시계만 들여다본다. 


만항재. 우리나라에서 자동차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고개. 새벽 3시가 넘은 시간에 왜 그곳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딱히 뭐라 설명할 수는 없지만 꼭 가봐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것도 지금 당장. 부랴부랴 차에 올라 지도를 펴고 위치를 확인한다. 마음은 급한데 머릿속에선 이런저런 생각이 겹친다. 해발 1,330m, 처음 가보는 길, 눈 내린 새벽. 마음은 어서 가라 재촉하지만 머릿속에선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가도 괜찮을까?'


'뭔 일이야 있겠어?' 


'그래도 위험할 텐데.'


'안 가면 후회할 지도 몰라.'


하지만 머뭇거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따끈한 커피 한 잔으로 언 몸을 녹이고 시동을 건다. 서늘한 새벽 공기 속에서 전해 오는 자동차 엔진의 미세한 떨림, 그 떨림은 여행을 떠나기 전의 설렘과 많이 닮았다. 지금이 그렇다. 몇 날 며칠을 기다려 떠나는 여행 전날처럼 가슴이 설렌다. 


고한읍 소재지를 벗어나 태백․동해로 이어지는 38번 국도를 되짚어 조금 오르니 만항재로 이어지는 414번 지방도로 표지판이 시야에 들어온다. 일명 ‘환상의 드라이브코스’로 통하는 바로 그 도로다. 가로등 불빛을 따라 시원스레 펼쳐진 38번 국도와는 달리 414번 지방도로는 좁고 어둡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낯선 길, 그 길로 차를 몰고 들어간다. 



띄엄띄엄 촉수 낮은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천천히 차를 몬다. 상향등을 켜 봐도 별반  도움될 게 없다. 어둠에 조금씩 눈이 익숙해 질 즈음, 저 멀리 산 중턱에 우뚝 선 석탑이 시선을 끈다.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 중 하나인 정암사의 수마노탑이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셔놓은 수마노탑은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에 의해 건축된 것으로 알려진 석탑이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해 놓았다는 탑의 내력도 내력이지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할로겐 조명을 받아 노랗게 물든 수마노탑의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정암사를 지나면서부터 가로등의 수가 현격히 줄어들기 시작하다가 어느 순간엔가 모든 빛이 사라져 버렸다. 무섬증이 날 정도의 어두움. 그래도 싫지만은 않다. 몇 번이나 차를 돌려야 한다고 마음을 먹지만 마음과는 달리 핸들 잡은 손은 꿋꿋이 정면을 향하고 있다. 문뜩문뜩 느껴지는 카타르시스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끝을 봐야 한다는 오기 때문이었을까. 얼마를 더 가야 할지, 그 끝을 알 수 없는 길을 따라 앞으로 앞으로 나간다. 시간이 무척이나 길게 느껴진다.  


반쪽짜리 달빛과 헤드라이트에 의지해 또 그렇게 한참을 오른다. 얼마나 올랐을까. 바닥의 색이 반짝반짝 은빛으로 빛나기 시작한다. 앞서 내린 눈 때문만은 아니 듯싶다. 상고대. 나무와 풀 그리고 바닥에까지 엉겨 붙은 서리가 순백의 세상을 만들어 낸 것이다.   



마침내 만항재 정상.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난다. 작은 조명등 하나에 의지해 그 모습을 드러낸 만항재는 어딘가 모르게 애잔한 분위기를 담고 있다. 검은 장막에 둘러싸인 만항재는 마치 세상과 단절된 별개의 공간처럼 다가온다. 현실과는 동 떨어진 또 다른 차원의 세계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차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본다. 무채색. 눈앞에 펼쳐진 세상엔 흑과 백 이외의 다른 색은 존재하지 않는다. 색이 바래버린 세상이다. 현실에선 존재할 수 없는 공간, 그 공간에 지금 내가 서 있다. 정말이지 오래도록 잊지 못할 멋진 풍경이다.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리저리 발자국을 남기며 나만의 공간에서 나만의 시간을 만끽해 본다.


하늘 아래 첫 마을, 두문동 마을

숙소로 돌아와 잠시 눈을 붙이고 이내 두문동 마을을 찾았다. 함백산을 터전 삼아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이 궁금했다. 사실 만항재를 오르며 만난 만항마을은 너무나 조용했다. 가게며 식당은 모두 자물쇠로 굳게 잠겨있었고 사람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두문동이다. 두문동은 행정구역상 강원도 정선군 고한2리에 속한다. 두문동재를 바라보고 자리한 두문동 역시 만항마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자그마한 산골마을이다. 1000 고지가 넘는 곳에 자리한 두문동은 말 그대로 하늘 아래 첫 번째 마을이다. 자그마한 계곡을 사이에 두고 6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앉은 모습이 정겹다.


“지금은  볼품없지만 그래도 이 계곡이 예전에는 우리 마을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했던 곳이라구. 마을 아낙들이 모두 여기로 나와 빨래도 하고 잡담도 나누고 그랬으니까.”


현재 고한2리 마을 이장을 맡고 있는 이원우 씨의 말이다. 그는 지난 73년 이곳 두문동으로 들어와 지금껏 이곳을 떠나지 않고 있다고 했다. 마을에서 자그마한 구멍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그는 ‘우리 가게가 이래 봬도 3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가게’라며 웃어 보인다.


“나도 탄광에서 일을 했지. 가게는 우리 집사람이 운영했고. 이 가게? 작다고 우습게 보면 안 돼. 우리 마을에선 이래 봬도 역사와 전통이 있는 가게라구. 탄광일도 그렇고 가게도 그렇고 80년대 중반 그러니까 85년도가 전성기였지.  그때는 고한읍 인구가 3만 명을 조금 넘었었는데 당시 정선군 전체 인구가 12만 정도였으니 고한읍 인구가 정선군 전체 인구의 삼십 프로를 차지하는 셈이잖아. 얼마나 대단해. 당시에는 학교 수업도 아이들이 워낙에 많으니까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눠서 진행했다니까. 우리 가게 바로 위에 학교 있잖아. 대성국민(초등)학교. 그 학교에만 학생 수가 1천 명을 넘었지.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던 학교로도 유명했지만 학생 수도 정선군 내에서는 손에 꼽힐 정도로 많았을걸. 못 믿겠으면 이 사진들을 좀 보라구.”


이원우 이장이 가리킨 사진은 운동장에 바글바글 모인 아이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었다. 아마도 운동회 때 찍은 사진인 듯싶다. 사진 속에는 아이들의 모습과 함께 학교 뒤로 빼곡히 들어찬 집들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었다. 불과 20년 전의 모습이라고 했다. 고한읍에서 인쇄물로 제작한 두툼한 사진책 속에는 이처럼 고한읍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1960년대부터 지난 2006년까지의 사진자료를 정리해 놓은 이 사진책은 마을 주민들이 소장하고 있던 사진과 읍사무소에서 보관하고 있던 사진들을 연대별로 묶어 제작한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게 한순간이더란 말이지. 1989년에 ‘석탄산업 합리화 사업’이 시작되면서 탄광들이 하나둘씩 폐광을 하더란 말이야. 그때 사람들이 많이 떠났어. 요즘 말로 비전이 없다고 생각했던 거지. 나도  그때 잠시 고민을 했었는데,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뭐 달리 할 일이 있어야지. 그렇게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지금까지 와버렸지만, 어쨌든  그때 떠난 사람이 줄잡아 1만 명 이상은 될 거야. 그리고 얼마 뒤에 1천 명이 넘는 아이들이 다니던 대성국민(초등)학교도 폐교가 됐지. 지금? 동네에 초등학생은 둘 뿐이야. 참 슬픈 일이지.”


오후에 일이 있다면 집을 나서는 이원우 이장을 뒤로 하고 천천히 마을 끝자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저 멀리 양지바른 곳에 혼자 앉아있는 할아버지 한 분이 보인다. 올해 예순여섯이라는 장선사 할아버지는 얼마 전부터 풍이 와 거동이 수월치 않았고 했다. 굵게 패인 주름의 깊이에서 할아버지의 고단한 삶이 읽힌다.


“날씨도 쌀쌀한데 왜 밖에 나와 계시느냐”고 묻자 “혼자 있는 게 영 답답하고 해서……”라며 뒷말을 얼버무리신다. 그렇게 앉아 계시는 할아버지의 모습에 잠시 말벗이나 되어드릴 요량으로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왜 혼자 나와 계세요?” 

“그냥 심심해서” 

“할머니는요?” 

“작년에 병원에 입원했는데… 젊은 양반 안 바쁘면 집에 잠시 들렀다 가지. 아들 녀석 올 시간이 됐는데 혼자 있자니 답답하고 그래서”


할아버지의 뒤를 좇아 들어간 집은 생각보다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다. 할머니도 없이 1년을 보낸 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다


“마을 사람들이 많이 도와줘. 김치도 가져다주고 밑반찬도 가져다주고. 가끔은 집에 들러 방청소도 해주고 가. 얼마나 고마운 사람들인지 몰라. 내가 이래서 이 마을을 떠날 수가 없어. 우리 할멈만 저렇게 되지 않았어도 아무 걱정이 없을 텐데……”



한 마디 한 마디 또박또박 말을 마친 할아버지의 눈에 눈물이 맺힌다. 한동안 말을 잊지 못하시던 할아버지가 가만히 손을 들어 한곳을 가리킨다. 돌아보니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있다. 두 분 모두 젊고 건강한 모습이다.  

건강하시라고 할머니도 곧 건강해 지실 거라고 인사를 드리고 집을 나선다. 날씨가 추우니 나오지 마시라는 말에도 아랑곳 않고 대문 앞까지 고된 몸을 끌고 배웅 나오신 할아버지 모습을 바라보며 많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작은 것도 나눌 줄 아는 마음의 여유, 그리고 그 나눔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 작은 마을 두문동에서 너무나 큰 것을 얻어가는 느낌이다.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진다. 가슴이 뜨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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