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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NP Aug 18. 2015

여행, 다시 쓰기 -영주 고치령-

태백과 소백을 품은 은둔의 땅, 영주 마락리

태백과 소백이 품은 은둔의 땅,

영주 마락리



태백산이 끝나고 소백산이 시작되는 백두대간의 주능선 고치령(760m). 단종과 금성대군의 애틋한 역사를 간직한 그 험준한 고개 너머 마락리가 있다. '영남의 고도(孤島)'라 불리는 마락리는 충북 의풍리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도경계 때문에 늘 고개 돌려 고치령 너머의 영주 땅을 그리워하며 살아가야 하는 마을이다.



중앙고속도로 풍기 나들목에서 빠져나와 931번 지방도를 타면서부터 이정표에는 어김없이 소수서원과 부석사가 등장한다. 그리고 갈림길마다 이 친절한 이정표는 자신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풍기 나들목에서 소수서원까지는 10여 km 그리고 여기서 다시 12km 정도를 더 가야 부석사에 닿을 수 있다. 고치령과 마락리로 이어지는 도로는 그 중간쯤 되는 지점에 있다. 단산면사무소가 위치한 단산면 옥대삼거리가 바로 그곳이다. 이곳에서 부석사로 이어지는 931번 지방도를 버리고 ‘좌석리 마락리’ 이정표를 따라 좌회전하면 고치령으로 이어지는 고갯길로 들어서게 된다.

아픈 역사를 보듬는 길

천천히 차를 몬다. 옥대삼거리에서 고치령까지는 거리가 제법이지만 그래도 도로가 잘 정비돼 있어 운전하기에 부담스럽지 않다. 아니 웬만한 드라이브 명소로 손꼽히는 곳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단산저수지를 끼고 도는 구간은 마치 호반도로를 달리는 듯 운치도 있다. 단산저수지를 5km 남짓 지나 좌석리와 연화동으로 이어지는 삼거리 두 개를 더 지나면 이제부터는 고치령으로 오르는 본격적인 고갯길이다.


고치령은 태백산이 끝나고 소백산이 시작되는 백두대간의 주능선이다. 하지만 이곳을 찾는 목적이 비단 그것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고치령에 얽힌 슬픈 역사와 그 역사를 보듬고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이 녹아있기에 그 여정은 더  뜻깊을 수밖에 없다.


차 두 대가 어깨를 맞대고 지나기에도 벅차 보이는 길을 따라 조심스레 차를 몬다. 그럭저럭 길의 형태를 유지하던 도로는 정상을 10여 분 정도 남기고 돌연 비포장으로 그 모습을 달리한다. 부담스러울 정도는 아니지만 밤새 내린 비 때문인지 도로 여기저기에 심한 고랑이 생겨 적잖이 애를 먹인다. 태백과 소백을 이어준다는, 그 상징적 의미에서 오는 이름값이라고 해야 할까. 고치령 역시 호락호락 그 모습을 내보이긴 싫은가 보다.



그렇게 올라선 고치령의 모습은 생각보 조금 밋밋하다. 뭔가 대단한 걸 기대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섭섭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뭘 기대했을까. 정선의 만항재에서 만난 설경이나 동해와 삼척시가 한눈에 들어오던 댓재의 장쾌한 풍광에 비견할 뭔가를 기대했던 걸까. 솔직히 그랬는지도 모른다. 사실 이들 두 고개에 비하면 고치령에서 바라다 보이는 풍광이라는 게 초라하기 그지없으니까. 하지만 그 속내에 담긴 슬픈 역사의 흔적은 단순히 눈으로  보여지는 것과는 그 깊이를 달리한다. 어린 나이에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에 오른 단종의 서글픈 걸음이 그러했을 것이고, 그의 복위를 위해 힘겹게 고개를 넘었을 금성대군의 고된 걸음이 또한 그러했을 것이기에. 뒤틀린 세상을 원망하며 또 그것을 바로잡고 싶었던 이들의 열망과 좌절이 고스란히 깃들어 있는 곳이 바로 이곳 고치령이다.


널찍한 공터에 차를 세운다. 언제 올랐는지 승합차 한 대가 한쪽 구석에 얌전하게도 주차해 있다. 아마도 백두대간 종주에 나선 이들의 차일 터다. 그 앞으로 삐뚤빼뚤 제 멋대로 선 장승과 금성대군과 단종을 모신 산신각이 자리해 있다. 산신각 맞은편으로 서있는 표지판엔 이곳이 고치령임을 알리는 문구와 마락리와 좌석리 그리고 마구령의 방향을 알리는 이정표가 제각각의 방향으로 엇갈려 있다.



삼신각에 잠시 둘러보고 발길을 돌리려는데 줄줄이 선 장승들 중 ‘太白天將’이란 글씨를 새긴 장승 하나가 유독 시선을 끈다. 네 개의 장승 중 가장 곧게 선 이 장승은 특이하게도 하단부에 남성의 성기가 조각돼 있다. 이곳이 음기가 강한 지역일까. 아니면 다른 어떤 이유가 있었던 걸까. 장승자체에 성기 숭배 사상이 담겨 있기에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장승자체를 성기 모양으로 깎아낸 경우도 있으니 자그마한 성기 하나 달아놓은 게 뭐 대단한 일일까 싶기도 하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만약 누군가 재미 삼아 새겨 넣은 것이라면 조금은 짓궂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고치령 정상에서 마락리까지는 오를 때와는 달리 비포장도로의 연속이다. 오른 만큼 다시 내려가야 하는 이 길은 온전한 등산로도 그렇다고 온전한 차도도 아니다. 그래서 등산객도 다니고 차도 다닌다. 제법 가파르게 이어진 길이고 보니 오를 때와는 달리 핸들을 잡은 두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간다. 변속기의 레버를 저속으로 옮기고 속도를 최대한 낮춘다.


고치령 정상에서 의아한 기분으로 한참을 들여다봤던, 전봇대에 적힌 카센터 전화번호에 생각이 미친다. 왜 인적 드문 그곳에 카센터와 콜택시 전화번호가 나란히 새겨져 있었는지, 그리고 이곳을 왜 마락(馬落)이라 불렀는지, 이제야 이해가 된다. 이리저리 구경하며 내려온 탓도 있지만, 그렇게 5km 정도를 내려오는 데 1시간이 족히 걸린 듯하다.


더 이상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한참을 흘러내리듯 지나온 길옆으로 자그마한 분교 하나가 시선을 끈다. 마락리에 있는, 아니 있었던 유일한 초등학교인 마락분교다. 1991년 문을 닫은 마락분교는 현재 마락청소년야영장으로 그 이름을 달리하고 있지만 그 모습은 옛 모습 그대로다. 아니 조금 더 세련되어졌을는지도 모른다. 한 여름 피서객들을 위한 야영장으로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역할이 어떻든 그래도 여느 지역의 폐교들처럼 을씨년스러운 모습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싶다.



마락분교 앞, 아니 마락청소년야영장 앞에서 자그마한 가게를 운영하는 전봉선(81) 할머니는 오늘도 가게일 보다는 밭일 나갈 준비로 분주하다. '그래도 마을에 하나뿐인 가게인데 이렇게 비워두고 어딜 가시냐'고 물으니, 내가 있으나 없으나 물건 가지고 가는 사람은 뻔하다며 웃어 보이신다.  


“이래 봬도 없는 것 빼고 다 있어. 우리 동네 사람들 저기 읍내에 있는 마트보다 우리 가게를 더 많이 찾는다니까.”


다 허물어져 가는 이곳에 물건이 있긴 있을까 의아스럽지만 할머니가 실망하실까 봐 끄덕끄덕 몇 번 장단을 맞춰드리니 가게 자랑에 끝이 없다. 이러다 늦겠다며, 분주하게 담아낸 보따리를 질끈 동여매고 일어서는 할머니를 따라 나선 건 잠시 빗방울이 비치던 즈음이다.


“이거 더덕이야. 내가 직접 저 산에서 캐온 것들이지. 아마 3년쯤 자란 놈들일 거야. 이걸 가져다 밭에 옮겨 심으면 2년쯤 뒤에 캐서 다시 내다 팔 수 있어.”

아련한 기억 어디쯤엔가 무심히 걸려있던 할머니에 대한 추억

전봉선 할머니가 가꾸는 밭은 할머니 댁에서 100m 정도 떨어진 언덕 위에 자리해 있었다. 먼 거리는 아니지만 작은 개울을 건너고 제법 가파른 언덕을 올라야 하기에 그리 만만한 코스는 아니었다. 할머니는 하루에 적게는 두 번, 많게는 대 여섯 번씩 이 길을 오르내리며 자식 여섯을 키워내셨다. 자식들은 이제 모두 결혼해 외지로 나갔지만 할머니는 아직도 이 길을 오가며 밭일을 하고 계신다. 벌써 60년도 더 된 일이다.

구부정하게 휜 허리에 힘겹게 매달린 등짐이 버거워 보여 들어드리려고 하니 ‘아서’라며 손사래를 치신다. 매일 하는 일이라 괜찮다며, 매일 와서 들어줄 거 아니면 아예 관두라며 발걸음을 재촉하신다. 할머니의 나지막한 머리 위로 어렵게 봄을 틔운 노란 산수유 꽃이 스쳐 지난다.


“왜 안 보고 싶겠어.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자식들인데. 그래도 그게 내 맘 대로 되는 일이 아니지. 지들도 지들 대로 할 일이 있는데 어떻게 자주 오겠어.”


자식 이야기가 나오자 한동안 말끝을 잇지 못하시는 할머니. 그 순간 할머니는 자식들을, 나는 할머니를 그리워하고 있었나 보다. ‘이거 한번 맛보라’며 손자 대하듯 다정하게 건네시는 더덕 뿌리를 받아 드는 순간 며칠 전 돌아가신 할머니에 대한 추억이 너무도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어린 손자들에게 찰떡 한 입 더 먹이려 수저를 들고 마당 이곳 저곳을 뛰어다니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아련한 기억 어디쯤엔가 무심하게 걸려있던 그 짧은 순간이 너무도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할머니가 주는 건 이렇게 먹어야 맛있다’며 손으로 흙을 탁탁 털어 건네시는 더덕을 받아 한입 베어 무니 그 향이 기가 막힌다. 아마도 할머니의 깊은 정이 배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래전 먹었던 찰떡도 아마 이런 맛이 아니었을까.  그때는 그 맛의 깊이를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지금 이렇게 가슴 한쪽이 저려오는 건 아마도 할머니의 손자 사랑이 그만큼 깊고 넓었기 때문이리라.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저만치 앞서 걸어가시던 할머니가 마침내 자리를 잡고 앉아 더덕을 심기 시작하신다. 살살살 흙을 고르고 그 위에 더덕 대여섯 뿌리를 내려놓으신다. 그리고 다시 조심조심 호미로 흙을 덮으신다. 그렇게 몇 번이고 같은 작업을 반복한 뒤에야 잠시 허리를 펴고 하늘을 보신다.


‘매일 이렇게 더덕을 심니 돈 많이 버시겠네요’하고 물으니, ‘지금 돈 벌어 뭐하게’ 하신다. ‘그럼 왜 이렇게 열심히 심으세요’ 하고 다시 물으니 ‘나중에 우리 애들 왔을 때 몇 뿌리라도 싸주려고’하신다.

이제는 손자 볼 나이가 된 자식들이지만 여든을 넘긴 노모 눈에는 여전히 이것저것 챙겨 줘야 하는 어린아이에 불과한가 보다. 아마도 할머니는 내가 이곳을 떠난 뒤에도 한참 동안 흙을 고르고 그 위에 더덕을 심을 것이다. 오늘만이 아니다. 내일도 모래도 그리고 글피도… 할머니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렇게 정성을 다해 더덕을 심고 또 심을 것이다. 한 뿌리 한 뿌리 할머니의 정성이 가득 담긴 더덕은 그래서 그 맛이 달고 향이 깊다. 할머니의, 어머니의 그 끝없는 사랑처럼…


글 사진 정철훈(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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