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가오굴 & 양관
둔황(敦煌)은 구법승과 대상이 끊임없이 드나들었던 실크로드의 주요 거점도시였다. 서역으로 떠나는 길의 시작이자, 중국으로 들어오는 길의 끝이었으니, 서로 다른 세계의 문화가 자연스레 어우러지는 최적의 장소였던 셈이다. 화려한 예술이 꽃처럼 피어나고 경제가 융성해진 건 그에 따른 자연스런 결과였다.
막가오굴(莫高窟)은 1300여년에 걸쳐 만들어진 석굴사원이다. 서기 366년 승려 낙준이 금빛 부처를 알현하고 기도처를 마련한 것을 시작으로 수많은 승려와 조각가들이 이곳에 석굴을 만들었다. 더러는 벽화를 남겼고, 더러는 불상을 남겼으며, 더러는 스스로의 위복을 기원하는 또 다른 무엇을 남기기도 했다. 700여 개에 이르던 석굴 중 바람에 깎이고 모래에 덮힌 석굴이 절반에 가깝지만 그래도 그 위용은 여전히 대단하다.
둔황을 거쳐 간 많은 구법승 중엔 신라 승려 혜초도 있었다. 스승 금강지의 권유로 16세의 나이에 인도로 떠났던 혜초는 이곳 작은 석굴 중 하나에 자신의 여정을 기록한 책자를 남겼다. 그리고 1000년 하고도 200년이 더 지난 1908년, 그 기록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왕오천축국전>이었다. 세계 4대 여행기 중 하나인 왕오천축국전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보다 500년이나 앞서 제작된 세계 최고(最古)의 여행서이다.
둔황의 서쪽 끝, 양관으로 가는 길은 거칠고 험한 사막 길의 연속이었다.
양관(陽關)은 남도 실크로드의 최전방 관문이다. 지금으로 치자면 국경 출입국 사무소 정도가 될 것이다. 그건 이 문을 통하지 않고는 더 이상 서쪽으로 나가거나, 혹은 중국으로 들어올 수 없다는 얘기다. 4년간의 긴 여정을 마무리한 혜초는 이곳을 지나며 마음의 평안을 얻었을까, 서역정벌의 원대한 꿈을 품었던 고선지 장군은 이곳을 지나며 전의를 새로이 다졌을까.
해상실크로드의 번성은 육로실크로드의 쇠퇴로 이어졌다. 그와 함께 양관도 서서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하지만 봉수대는 지금도 여전히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2000년 동안 자신을 지탱해 준 든든한 모래언덕 위에 기대듯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