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샘추위

짧은 소설

by 여름

어제와 다르게 오늘은 날씨가 서늘하다 못해 쌀쌀하다. 꽃샘추위가 시작됐나 보다. 집에서 잠바를 걸치고 나오지 않은 것에 후회하며 세탁소 한편에 자리 잡은 먼지 탄 히터를 튼다. 나름 오랜만에 트는 히터는 미지근한 바람과 함께 우우웅 거리는 힘겨운 소리를 내뿜는다. 갑갑한 수증기 냄새와 히터의 건조함이 한 번에 몰려와 어제 마시다 남은 물을 벌컥 마시며 유리창을 힐끗 쳐다본다. 역시나 오늘도 세탁소 앞에 놓인 플라스틱 의자에 얼굴에 검버섯을 가득 피운 노파가 자리 잡고 있다. 노파는 한 달 전쯤부터 늘 똑같은 차림새로 세탁소 앞에 앉아 있다. 탁한 분홍색 얇은 잠옷 바람에 여기저기 올이 나간 낡은 갈색 목도리를 하고선 제자리를 지키다가 내가 퇴근할 때쯤이면 인기척도 없이 어딘가로 사라진다. 노파는 늘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허공을 바라보며 목도리를 만지작거린다.

오늘 노파는 평소와는 확실히 다르다. 갑자기 다시 추워진 날씨 탓인지,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아까부터 노파는 자꾸만 이상한 행동을 한다. 가뜩이나 주름진 얼굴을 더욱더 구기다가 갑자기 몇 없는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그리고 어린아이라도 된 듯 무언가 불안한 표정으로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다. 옷가지를 들고 세탁소에 들어오려는 여자 중 몇은 노파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리며 되돌아가기도 했다.

담뱃갑을 들고 세탁소 앞으로 나오니 세찬 바람 때문에 눈 뜨기가 힘들다. 추위에 기침을 두어 번 하니 노파가 뒤를 돌아 나를 쳐다본다. 노파의 튀어나온 눈동자가 힘없이 떨린다. 영식아··. 영식아···. 노파가 내게 다가오며 말을 한다. 순간, 당황스러움에 휩싸였다. 나는 영식이란 사람이 아닐뿐더러 노파와 아는 사이도 아니다. 네?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도로 빼며 노파에게 물었다. 영식아, 날이 추워··. 우리 아들, 감기 걸리면 안 돼. 안 되고말고. 노파는 축축한 눈을 한 채 떨리는 손으로 목도리를 벗어 내 목에 감아준다. 저, 할머님. 사람을 착각하신 것 같습니다. 저는 영식이란 분이 아니에요. 노파의 손길을 뿌리치며 말했다. 길가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노파는 눈물을 글썽이며 계속해서 영식이란 사람을 찾는다. 노파에게서 몇 년 전, 치매를 앓다가 돌아가신 어머니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어머니는 늘 내 기억 속에 없는 외할머니를 저 노파와 같은 모습으로 애타게 찾으셨다. 울음을 터트리며 엄마를 찾는 모습이 아이와 다를 게 없었다.

노파는 내 앞에 서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내가 거부해도 계속 내게 목도리를 매 주려 한다. 엄마! 어디선가 중년 여성이 이쪽으로 뛰어온다. 여성은 가쁜 숨을 내쉬며 노파의 팔을 잡는다. 엄마, 뭐 하는 거야. 제발 그러지 마. 이분 오빠 아니야. 여성은 노파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한다. 노파는 여성에게서 팔을 빼내려 인상을 쓰며 힘을 준다. 그럴수록 여성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간다. 우리 영식이 맞아. 왜 그래. 저리 가. 우리 영식이 추워. 목도리 줘야 해. 노파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귓속이 따갑다. 저번부터 왜 그래! 오빠는 죽었어! 엄마··. 나 이제 힘들어··. 이제 그만하자 제발··. 여성의 소리에 노파는 깜짝 놀라다가 금세 표정이 굳어진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노파는 정신이 든 것인지 내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한다. 여성도 노파의 옆에서 연신 고개를 숙인다. 나는 가볍게 인사를 하며 이제 가라는 손짓을 보인다.

아까 피려 했던 담배를 다시 입에 물었다. 뿌연 담배 연기 사이로 노파가 앉아 있던 자리를 바라본다. 방금 전 노파의 축 처진 뒷모습이 생각난다. 차가운 플라스틱 의자에 왠지 노파의 온기가 남아 있을 것만 같다. 노파에게 가려 보이지 않던 의자 밑의 노란 민들레 꽃이 세찬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