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요즘 많이 바쁘신가요. 가을에 저랑 전시하시겠어요? ‘동양화’에 대한 전시를 하려는데 작가님이 떠올랐습니다. 처음엔 ‘한옥에서의 동양화 전시’를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오래지 않아 동양화라는 말을 굳이 붙이지 않고 전통을 사유하는 전시로 느슨하게 바뀌었어요. 주어진 간극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혼란스러웠지만 이제는 오늘의 한국이 동양화를 보는 시선은 양극단 사이에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마음대로 보호하거나, 곤란하여 못 본 척하거나. 따라서 처음에 들었던 의문으로 시작합니다. 저는 사이에 끼어있다가도 허공을 표류하는 느낌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으려고 해요.
‘한옥’과 ‘동양화’, ‘전시’가 교차하는 처음의 의뢰는 흥미로웠습니다. 의심 없이 본다면 과거에는 이랬겠거니! 하는 생각이 절로 들지만, ‘한옥에서의 동양화 전시’는 생각보다 특수한 사건입니다. ‘한옥’은 서양식 가옥과의 구분을 위해 근대에 지어진 개념이고, 공공장소를 대중에게 개방하는 ‘전시’에는 근대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으며, ‘동양화’라는 이름 또한 일제강점기 일본의 동양주의로 인해 생겼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옥’과 ‘전시’, ‘동양화’라는 틀을 의심하는 데서 시작하면 어떨까? 서화가 배렴 선생의 한옥과 동양화-한국화 작업을 하는 젊은 작가를 잇는 데에는 어떤 위험과 가능성이 있을까? 한옥과 전시, 동양화라는 틀은 어떻게 겹쳐지며, 중첩된 틀의 배후에 깔린 욕망은 무엇일까? 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말은 그림의 전부를 담을 수 없지만, 특히 ‘동양화’라는 말은 그림의 성격을 전해야 한다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채 동양화라는 이름이 붙은 그림들의 총합을 버거워하고 있어요. ‘동양화’라는 단어는 과거에도, 오늘날 한국의 역동적인 정치・경제・문화적 조건 속에서도 안착하지 못한 채 오작동합니다. 전통의 요소들을 탐구하는 이들은 끊임없이 맞부딪히는 단층 위에서 자신의 좌표를 가늠해야 하고요. 발을 기왕 담구었으니 때를 불려 보자면, ‘그림(畵)’으로부터 떼어진 ‘동양’과 ‘한국’은 ‘동양화’와 ‘한국화’에 붙어 있을 때와는 다른, 나름의 의미를 획득하며 돌아다니고 있는 것도 같아요.
작가님께 이렇게 연락을 드리긴 했지만 ‘동양화 장르의 작가’를 찾는 일은 머리가 아프더군요. 최근에는 자신을 동양화가로 정체화하는 작가도 적을뿐더러 ‘동양의 예술이론’을 기반으로 하는지도 분명치 않잖아요. 저는 인터넷 검색으로 작가를 찾는데, 매우 피상적이지만 붓이나 색을 쓰는 방식을 살펴보면서 ‘어 이 사람 동양화를 하는 사람인 게 아닐까?’라고 추측을 한 다음 조사를 이어갑니다. 그러면 ‘맞을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습니다. 어느 날에는 루이스 부르주아의 그림들마저 동양화처럼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렇다면 ‘동양화’라는 말은 무엇을 소환하며, 동양화의 유산을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탐구하는 이들은 무엇을 겨누고 그림을 그리는 걸까요?
그렇지만 ‘동양화’ 혹은 ‘한국화’라는 틀이 제시될 때는 불편하다가 이제는 아무 틀도 없다고 하니 그것 또한 고민이 되었습니다. 억지스러운 이름이나마 불러서 소환하지 않으면 말 붙일 일 없이 조용히 있어야 되더라고요. 근대기에 만들어진 동양화와 한옥에 붙어 있는 전통이라는 말도 그래요. 서구 미술에도 유구한 역사가 있거늘 거기에 전통이라는 말은 잘 안 쓰지 않나요? 그리고 자유롭다라는 건 뭘까요. 유명 현대 미술가의 난민 보트를 닮은 디자인 소품이 번화가의 매장에 내걸리는 시대잖아요. 쌍화차에서 아인슈페너까지 다 파는 동시대의 한옥 카페를 보면서 이 시대의 자유란 뭘까. 십전대보탕처럼 독특한 음료를 끓이는 걸 눈앞에서 보여주면 풍미가 돋고 좋은 맛이 나서 사람들이 더욱 좋아하게 되는 걸까를 고민했습니다. 이어지는 고민. 그걸 먹으면 사람들이 진짜로 건강해지는 걸까. 건강이란 뭘까. 안 건강하면 안 될까... 등등. 결국 희끄무레한 두 번째 의뢰로부터, 두 번째 의뢰에 포섭이 가능한 첫 번째 의뢰로 회귀해 ‘동양화’와 ‘한국화’라는 요상한 이름을 잠시 이용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니 이번 전시는 “말에 부응하는, 말을 초과하는 그림”, 즉 ‘동양화’라는 말에 일시적으로 부응하면서 ‘동양화’라는 말을 초과하는 그림들을 소환하게 될 겁니다.
저는 지시하는 대상이 엇갈리는 ‘동양화’가 사뮈엘 베케트의 부조리극에 나오는 ‘고도’와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디디와 고고는 고도를 기다리나 얼굴도 모르는 고도는 오지 않아요. 두 사람은 지난한 삶을 견디려 그를 호명하지만 이야기는 고도를 비껴갑니다. 이들은 힘 없는 노년 같다가 유약한 청년 같고, 자주 투닥거리다가도 어느새 둘이 서로를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글을 읽다보면 점차 누가 디디이고 고고인지 헷갈리다가 무엇이 고도인지, 고도가 정말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없게 됩니다. 저는 디디와 고고가 처한 모순이 동양화와 한국화를 탐구 중인 이들과 닮아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고도가 오지 않는다면. 동양화의 유일무이한 궁극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고도에 관한 대화-동양화를 화두로 벌이는 실천은 무의미한 것일까요? 동양화의 의미가 백가쟁명에 의해 유동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면 저희는 어떠한 답을 제시해야 할까요?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으면 논리의 정합성보다는 대화 자체의 맛과 모순이 지닌 재미를 느끼게 됩니다. 저는 등장인물을을 따라 모순에 모순으로 응하는 처세를 시도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집 안에 있으면서 도망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과 그에 대한 답으로 “보이는 곳으로 숨기”, “지면에 중첩된 지평을 걷기”, “무엇을 말하면서 무엇을 잊기”와 같은 전략을 생각했어요.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본다’는 개념인 “이소견대(以小見大)”를 아시나요? 여기에는 소박한 것에서 많은 것을 누리고자 한 문인의 도덕은 물론, 겨자씨에 수미산이 들어간다는 불교의 세계관과 호리병 속에 선경을 담는 허무맹랑한 상상력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소견대 사상이 본격적으로 회화를 통해 발휘된 것은 중당 이후로, 장대한 미감을 선호했던 시대도 있었기에 중국의 전 역사와 지역에서 통용되었던 것이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1] 동아시아에서만 있었던 생각도 아니고요. 일례로 영국의 시인이자 화가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순수의 전조」에서 “한 알의 모래에서 세상을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는 구절을 남겼습니다.[2] 한편 인도에서는 힌두교의 신 크리슈나가 어린 아이의 모습이었을 때의 일화가 전해져 와요. 양어머니가 땅에서 흙을 주워 먹던 크리슈나에게 입을 벌려 보게 하자 입 안에 온 우주가 들어 있었다고 하죠. 이러한 개념들은 정확히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얼마간의 보편성을 전제합니다. 그렇다면 이를 그림을 설명하는 데 가지고 오는 것은 무의미할까요. 저는 ‘우리’로 묶이는 공동체의 ‘고유한 것’을 널리 알려야 한다는 부담 대신, 여기에서 이야기되고 저기에서도 이야기될 수 있는 무언가를 돌아보고자 했습니다.
작가님의 그림을 두고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어요. 저는 작가님의 그림이 ‘작음’이 얼마나 다양한 결로 존재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그림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작음’은 작거나 큰 대상을 조그맣게 혹은 간략화하여 그린 것일 수 있지만, 맵고 쓰거나 추하고 더러운 것들. 가만히 들여다보았을 때 더 잘 느낄 수 있는 미미한 존재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말한다는 주제를 거대한 세계의 모순과 힘의 관계를 일순간 감각하게 하는 ‘동양화’라는 작은 말과 그림에 엮을 수도 있겠네요.
저는 비대한 전시와는 다른, 작은 것을 오래 보는 시공을 제시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손쉽게 작은 것이 귀여움으로 물신화되어 소비되는 세태를 고려한다면, 작업이 지닌 각기 다른 결을 살리고 기존의 논리에 붙들리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야 할 것 같아요. 몇 가지 제가 생각해 둔 전략을 말씀드릴게요. “어떻게 하면 집 안에 있으면서 도망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전시장 밖으로 그림이 튀어나오는 물리적인 방식을 말하는 건 아니고, 기존의 관념과 물리적인 제약을 비약으로써 초과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작은 그림-작은 세계-를 가까이서 들여다보게 하는 연출이 관객의 집중력과 상상력을 발휘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겠지요.
먼저 한옥에 있는 가구들을 이용하려고 해요. 동선을 구불구불하게 해서 관객의 체류 시간을 늘리고, 그림의 일부는 가구의 뒤나 밑,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살짝 숨기고요. 전시장을 어둡게 하고 조명을 그림에 집중해 관조의 공간을 창출하는 방식도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건 동료 작가가 아이디어를 준 건데 손바닥보다 작은 그림을 손에 쥐고 감상하게 하는 방법도 재미있지 않을까요. 옛날 사람들은 그림을 늘 걸어놓기보다는 두루마리를 조물조물 만져가면서, 여러 사람과 돌려가면서 감상했을 것이잖아요. 꼭 두루마리 형식을 가져올 것은 아니지만 작은 그림으로 유사한 감각을 구현하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새를 그린 그림을 보는 것과 새를 그린 작은 그림을 손에 쥐고 감상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니까요.
기존의 관점에서 동양화로 분류되지 않았으나 한옥과 동양화, 전시의 틀로 보았을 때 새롭게 읽을 수 있는 작업도 흥미로울지 모릅니다. 앞서 제가 전통의 계승을 의도하지 않은 경우에도 과거와 연관되거나 굳어진 틀 속에서 독해되는 경우가 우려된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이를 역이용하는 것이죠. 한옥에 죽은 병아리를 그린 그림을 들여옴으로써 팔대산인의 〈계추도〉를 연상케 하는 식으로요. 혹은 화이트큐브에 전시된 이발소 그림이 원근법에 따른 회화와 고급 예술에 대한 비평이 되는 것처럼, ‘동양화가 아닌 것’이 한옥에 들어왔을 때 동양화로 읽히는 상황을 유희하면 어떨까요? 그러니까 민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그린 호랑이 그림을 호랑이해에 민화로 읽히게 하는 일을 능동적으로 시도해 보는 것입니다. 물건을 보이는 곳에 숨기는 장난 같은 것이죠.
자. 이제 한옥에서 동양화를 전시하는 것에 대한 꽤 긴 알리바이가 만들어졌습니다. 대신 작업해 줄 것도 아니면서 말이 많았네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생각했던 대로 안 되어도 재미있을 거 같아요. 그러니까 저는 디디고, 작가님은 고고인 거죠. 그럼 이쯤에서 고도를 기다려 볼까요.
2022년 봄
윤형신 드림
[1] 주량즈, 『인문정신으로 동양 예술을 탐하다』, 서진희 역, (알마출판사, 2015), pp. 167-224.
[2] 윌리엄 블레이크, 「순수의 전조(Auguries of Innocence)」, 『천국과 지옥의 결혼: 윌리엄 블레이크 시선 Ⅲ』, 김천봉 역 참고, (글과글사이, 2017), 페이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