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운동장에서 햇빛을 가린 손을 들여다본 적이 있나요
지이호의 2018 ~ 2022년 작업에 관하여
(작가 홈페이지에서 작업을 보고 읽으면 좋습니다. - 2022년 7월 26일 재수정)
<뜨거운 운동장에서 햇빛을 가린 손을 들여다본 적이 있나요>
뜨거운 운동장에서 햇빛을 가린 손을 들여다본 적이 있습니까? 눈을 감고 해를 바라본 적은요? 빛을 응시하다 눈을 떼면 허공을 떠다니는 녹색 빛 얼룩에 가끔은 의문을 품어 본 적이 있나요? 날개가 달린 얇은 사람은 손을 쭉 뻗어 무언가를 받들거나 붙잡으려는 비장한 자세로 엉거주춤하게 서 있습니다. 반투명한 밀랍 아래 실밥을 눈으로 만지면 맥박에 지문을 남기는 느낌입니다. 까인 살처럼 발긋한 색. 밀랍이 덮은 눈두덩과 조각도로 새긴 깃털. 여기로부터 사람의 눈꺼풀이 떠올랐어요. 눈꺼풀은 사람이 처음으로 마주 본 벽이라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눈을 감고 태양을 보면, 결국에는 볼 뿐이지만. 몸을 돌다가 눈까지 흘러온 붉은 피를 짐작할 수 있어요. 눈꺼풀에서도 태양열이 느껴집니다. 눈을 떠 하늘을 보면 햇빛이 스민 손가락에 붉은 기운이 감돌고요. 태양을 보는 것과 태양을 향해 나는 건 닮은꼴의 무모함에서 비롯되었을 겁니다. 밀랍으로 지은 이카로스의 날개가 아니어도 그처럼 이글거리는 곳에선 무엇이든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죠. 그러나 취약함은 친절하게 남아, 날지 않아도 아스팔트에 쓸린 살갗은 화상을 입고 피부에 피어난 암은 때로 몸속 장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욕망을 위해 고안한 보철마저 순식간에 실험실 한구석의 폐기물통으로 던져지기 일쑤죠. 지난번 제가 작가님이 돌보는 개와 인사했던 거 기억나시나요. 나이 든 개는 털이 은빛이고, 작가님이 ‘티제이’라고 하이 톤으로 이름을 부르면 무심하게 반응을 해요. 티읕이 튕기는 발랄함과 제이가 부르는 노스탤지어가 첫인상이었는데. 그래서 입 속에서 굴려보는 이름이었는데. 그런데 티와 제이라는 이니셜이 강아지가 받았던 탈장 수술에서 따온 거라니. 정말 못된 이름이군요. 짓궂은 장난은 친한 애들끼리만 치는 거니까. 못된 이름은 오래 살라고 붙이는 이름이니까. 둘 사이를 두어 번 본 주제에 알 수는 없지만, 갑작스레 개가 잇몸으로 손을 물어서 조금은 친해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습니다. 위층 작업실에는 개를 떠올리며 그린 그림이 있어요. 그림에는 수술포로 만든 상자가 있고 상자에는 구멍이 나 있습니다. 상자의 구멍으로 개는 어린 왕자의 양처럼 보이지 않아요. 저기쯤일 거라고 어림짐작해야 합니다. 아니면 속 모르는 상자는 털밖에는 쓰다듬을 수 없는 개에 대한 은유겠지요. 그림에 우두커니 있는 상자는 구멍에서 누가 나를 엿봐요. 모르는 세계가 건너에서 이쪽을 바라봅니다. 눈구멍처럼 눈알이 없는데도 이쪽을 응시해서 자꾸만 바라보게 되고 멀리서도 이상한 느낌이 들어요. 그림의 시선을 피해 뒷면으로 가도 기묘한 느낌이 드는 건 죽은 것이 살아 있는 듯한 모습 때문일 겁니다. 방 안의 그림들은 벽에서 떨어져 나와 스스로 서 있는데, 서 있는 그림의 알루미늄 틀은 그림의 등 뒤로 자라난 것 같은. 뼈처럼 튀어나온 것 같은 그런 인상을 줍니다. 알루미늄의 휘지 않는 은빛이 냉랭해요. 한데 개를 떠올리며 그린 이 그림이 나무다리를 달고 얇은 천으로 감싼 것이라고요. 개의 배에 남은 흉터를 떠올리며 그림의 뒷면을 꿰맸다고요. 야물지 않은 바느질이 무심코 그림을 밀면 무너질 것 같아요. 그러나 그림은 시침을 뗀 채 서 있고 개는 저만치 그림 밖을 걸어갑니다. 얇은 것을 기어이 세우고 돌아가 반대 면을 확인하는 것. 얇은 조각을 손에 놓고 뒤집어 뒷면을 알게 하는 것. 그것을 위를 향해 열리는 서랍에 포개어 누이는 것. 사진 뒤에 보석처럼 암처럼 자란 덩어리와 뒤집으면 어려지는, 실로 수놓은 날개. 앞 뒷면을 반전하여 의미를 만드는 건 한 번에 한 면만 보는 인간의 협소한 시야를 이용한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그리는 사람도 온전히 가늠하기 어려운 심연을 평면의 요소로 암시하려는지가 궁금해졌습니다. 여기까지가 첫 번째 소견이었습니다. 그런데 좀 더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수술포에 그린 그림. 수술복을 입은 사람이 등장하는 그림 말이에요. 그림 전면을 물감으로 덮거나 전부 다 환영으로 채우진 않았잖아요. 수술포에 구멍을 내고 여분을 틀 뒤로 넘겨서 커튼처럼 늘어뜨린 건데. 수술포에 음영을 넣어 사물과 환영의 중간. 수술복의 형상이 떠올랐는데. 마루 위 골프공에 그림 속 골프공의 크기를 맞추려 했다고요. 모니터상으로 확인했던 사물의 무게를 다른 물건으로 재현할 계획이라고요. 종류별로 피부색 물감을 모았지만 하얀 종이에 바르면 사람 색 같지가 않았다고요. 조그마한 그림이 원래는 사람만 하게 만들려고 했던 거라니. 조그맣게 그린 그림을 큰 그림 옆에 새끼처럼 가져다 둔다니. 큰 그림이 작은 그림을 낳았나. 아니 작은 그림이 큰 그림의 어미인 건가요. 이것들은 에스키스와 마케트, 오브제 사이를 교차하는 중인가요. 같은 색깔의 공을 던지는 저글링 쇼처럼 이 공이 저 공인가를 알아보는 건 요원하니까 공중에 공을 띄우는 솜씨를 멍하게 보면 되나요. 던질 때마다 떨어지는데 띄우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손에 쥘 것을 건너편의 것을 사라진 것을 부르기 위함인가요. 몸을 덮는 수술포는 자신의 조각을 잃었다고 해요. 습한 날에는 부스럼처럼 바스러지고 진물처럼 엉긴 물감이 유화도 아니면서 자꾸만 손에 묻어난다고요. 조각 그림과 씨앗이 담긴 서랍에서 수술실과 약초방. 그 중간의 냄새가 피어난다고요. 서랍의 몸으로 들어간 다른 몸. 열었다가 닫는 것. 녹이며 건지고. 고치며 찌르기. 서랍에 넣은 날개가 떠나간 존재를 위한 건지 나중에 올 누군가를 위해 준비한 것인지 잊었습니다만, 몸의 조각을 보관하는 건 생각보다 오래된 의식이라고 합니다. 의사 면허는 없지만 그림에 드러난 증상을 토대로 진단하면 이런 게 아닐까요. 불투명한 몸에 대한, 알고 싶은 것을 보고 싶은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