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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신 Jul 28. 2021

독립출판『옵션』

죽거나 죽지 않고, 망하거나 망하지 않고 

살아가는 법 도모하기

졸업을 앞둔 예비 미술인들에게. 


이 글은 2019년 겨울 미술대학 졸업을 앞둔/하게 된 이정훈, 이유경, 해미, 유정, 윤형신이 함께 발행한 독립출판물『옵션』에 실린 글입니다. 블로그 포맷에 맞게 『옵션』에 실린 이미지 일부를 재배치했습니다.



 












    작년 이맘때는 나의 졸업 전시 기간이었다. 4학년 1학기와 여름방학을 교환학생에 모조리 써버린 후 급작스레 귀국해서는, 그곳에서 배운 삶의 여유라는 가치가 무색하게도 무턱 대고 졸전 직전까지 자신에게 채찍질을 했더랬다. 애초에 시도한 탈출도 끝없는 성과를 쥐어짜는 형광등 불빛이 끔찍스레 느껴져 결심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잠들기 직전까지 천장에서 나를 응시하는, 새벽에 눈을 떠서도 변함없이 켜져 있는 과실의 형광등 불빛이 지겨워질 때쯤 졸전은 허무하게 끝이 났지만 스트레스로 인한 호르몬 불균형 때문에 2달 넘게 내리 한 생리처럼, 생활의 무너진 균형을 되찾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분 단위로 돌아갔던 졸전 이후 눈금 없이 주어진 느슨한 시간을 지나며 차츰 나를 둘러싸고 빠르게 회전하는 세계가, 내면 깊숙한 곳까지 미치는 그 막강한 영향력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삶과 예술을 지속 할 방법에 대한 몇 가지 생각들을 하게 되었다.


     한국 특유의 억척스러움에 더불어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 대한 날렵한 적응력은 갖추기 어려운 동시에 어디서나 유용하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주어진 강령을 수행하기 위해 잠을 줄이고 수많은 정보를 머릿속에 욱여넣으며 언어를 바꾸는 등 내가 아닌 다른 초월적 존재가 되어야 한다. 세상에 이미 존재하는 수많은 기준과 더불어 ‘순수미술’이 요구하는 기준의 하한선은 더욱 가혹하다. 스스로 세운 기준마저 가혹한 동시에 경쟁 시스템에 그다지 적절하지도 않은 예술가들은 가용한 자본과 시간, 체력과 정신을 일단 모조리 끌어다 쓰며 자원이 고갈되기 전에 무언가 완성되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앞에서 나열한 모든 것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다 돈으로 환원이 가능하니 결국은 돈, 돈의 문제다. 미술에 대한 대중의 빈한한 관심과 한 자리에 수백 명이 응모하는 조건부 지원 속에서 대학 밖으로 밀려 나온 미술 꿈나무들은 내가 유명해지거나 남이 유명해지는, 심하게는 내가 죽거나 남이 죽는 시스템 속으로 빠지거나 뛰어든다.


 













    한국은 자진(自進)1 함으로써 자진(自盡)2하는 사회다. 물기는 증발하여 자연히 사라진다. 하지만 흘린 피와 눈물은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누군가가 흘린 피가 저절로 사라지는 것은 이미 사회의 한 현상이 되었다. 각자 모두는 자신이, 혹은 가까운 누군가가 흘린 피를 스스로 닦아야 하는 막막 함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각자의 아연함은 사회적 공감과 수용으로써 해소되지 못하고 풀리지 않는 루프 속에서 반복 재생된다. 시각적 자극은 반복으로써 이전의 충격을 희미하게 만들지만, 각자가 느끼는 고통의 감각 또한 그러한 것은 아니다. 자살이 개인의 온전한 자발적 선택이 아닌 것처럼 ‘예술’을 선택한 이들이 예술을 지속하는 것 또한 자발성과 비자발성을 내포하는, 개인과 사회라는 실로 엉킨 단단한 매듭의 결절점이다. 이 같은 극단적인 비유를 들어 예술인의 삶의 조건에 대해 말하는 까닭은 작가에게 고독한 ‘수행자’ 또는 타인을 대신하여 고초를 겪은 위대한 ‘순교자’의 이미지를 덧씌워 여타와 구별되는 희소성을 내세우고자 함이 아니라, 더 이상 뛰어난 예술가 개인이 사회의 문제를 타개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예술가 자신의 생활조차 담보하지 못하는 작금의 상황을 언급하고자 함에 있다.















     자신이 자신에게 얼마나 가혹하고 폭력적일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본다면 폭력은 나와 타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만은 아닐 것이다. 사회적 기준에 맞추어 당연하게 설정한 기준치는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허용치가 되며, 인내의 한계치를 넘었을 때 우리는 가차 없어진다. 얼마 남지 않은 작업 기한 내로 목표하는 졸업 작품의 퀄리티를 맞추기 위해서는 반드시 여러 날의 밤을 새워야만 했다. 작업 개념과 상관없이 1인당 1/n로 배분한 공간을 채우라는 우악스러운 요구에 맞추어 길 이 170cm가량의 철조 작업을 하며 가끔은 이웃 작업실 친구에게 내 키만 한 관들을 짜고 있다고 자조했고, 원하는 작업량을 채우지 못했을 때에는 스스로를 괴롭게 만들었다.














     스스로가 세운, 혹은 맞추려든 기준 외에 나를 둘러싼 작업 환경 또한 위태로웠다. 애초에 철조란 각종 전동 기구와 절단 기구, 용접 기구의 사용을 필요로 하므로 각자가 위험을 감수하고 행하는 작업이지만 이에 더하여 학교 내의 철조실은 환기 시설이 잘 갖춰져 있지 않고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미세먼지 수치가 서울 시내의 몇 배에 달하는 굉장히 열악한 환경이었다. 게다가 졸전 기간 동안 야작을 할 때마다 작업 동지가 없어 철조실에 홀로 늦게까지 남아 있어야 했다. 만약 새벽에 크게 다쳐 쓰러졌다고 가정하면 다음 날 일러도 10시쯤에야 발견이 될 테니 꽤 위험한 상황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졸업 당해의 연말에는 다른 작업실의 누군가가 손가락이 절단되는 사고로 실려 갔다는 비보가 들려오기도 했다. 다행히 그의 곁에는 작업을 하던 동료들이 있었지만 나 자신이 도무지 왜 그런 위험한 상황에 자발적으로 버티고 있었던 것일까를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건 분명 작업에 대한 열정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부피를 차지하는 완결된 형태의 결과물을 선호하는 작가라면 조소 작업은 대개 건강에 나쁘다. 나무와 돌과 같은 무해한 재료를 사용할지라도 갈거나 깎고 윤을 내는 공정에서 나오는 먼지를 마시면 폐는 안 좋아질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한 최대한의 보호장구는 반드시 필요하다. 소조 작업에 자주 쓰이는 화학약품 역시 주의를 요한다. 조각가들이 빈번하게 사용하는 화학물질 중 하나는 FRP인데, 가볍고 견고하며 작업 효율이 높지만 작업 공정뿐 아니라 사후에 처리에서도 환경호르몬 등의 발암물질이 발생하는 위험한 재료다.3 이것을 사용하게 되면 두통과 함께 얼굴이 붓고, 생리 주기가 바뀌는 등 신체에 미치는 영향이 가시적으로 나타난다. 해외에서는 한쪽으로 바람을 보내는 송풍기가 구비된 작업장에서, 우주복 같은 보호구를 착용해야만 이 위험 물질의 사용 허가가 나지만 내가 들었던 학부 수업에 서는 이러한 화학 약품들을 바람 부는 야외에서 라텍스 장갑 한 겹 끼고 후하게도 썼더랬다. 이전 세대에서는 화학 약품의 유해성에 대한 인식이 더욱 부족해 FRP를 맨손으로 반죽하는 괴이한 일들도 벌어졌다고 한다. 산업체에서 이러한 일이 벌어졌다면 최소한 사후(事後)에 문제 제기는 되었을 터인데 예술인들은 대개 외따로 떨어져 각개 전투를 벌이고, 자기 자신에게 고용되며, 자발적 의지로 작업을 한다는 관념이 있어 열악한 노동 환경으로 인해 발생하는 건강 문제가 가시화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최근 들어서야 겨우 문제시되고 있는 위험의 외주화 또한 미술계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다. 졸업 후 사회로 나와 갤러리에 근무하면서 FRP로 다수의 소조 작업을 하는 한 작가를 만날 수 있었다. 작가에게 재료가 몸에 안 좋을 텐데 어떻게 작업을 하는지 묻자 곧바로 자신이 작업하지 않으면 된다는 답을 들어 한동안 머리가 멍했더랬다. 유명한 작가의 위험한 작업을 대신해 줄 사람은 깊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미술 대학을 갓 졸업한 예술 꿈나무들이 대다수일 터인데, 경험과 지위, 경제적 위계 차이로 인한 노동과 건강의 착취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적극적인 문제 제기 외에도 고용주인 선배 예술인들이 본인의 도덕관을 성찰하고 작업 환경 개선을 위해 행동해야만 한다.


     잠깐 방향을 바꾸어서, 졸업 전시를 준비하며 든 또 한 가지 생각은 필연적으로 나는 얼마간의 쓰레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점이었다. 경험치가 달리는 한 인간의 미숙함이 폐기물의 대량 생산에 한몫을 한 것은 분명하나, 그 어리숙함을 차 치하더라도 졸업 전시를 위해 샀던 많은 양의 재료들은 결국에는 쓰지 않고 버릴 수밖에 없었다. 순수미술의 절대적 기준 하에서, 그리고 경제적 가치를 결정하는 사회적 기준 하에서 작가들이 바지런히 생성해낸 생산물은 작업이 될 수 있는 것 과 없는 것, 전시에서 보여지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전시가 끝난 후까지도 보존될 것과 아닌 것, 그리고 팔릴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양분된다. 그러잖아도 최대한의 효율로 한정된 자원을 활용해야 하는 예술인들에게 무용한 불량품이 생성된다면 이는 크나큰 손실이다. 작품성이나 상품성을 부여 받지 못하고 시각장의 바깥으로 버려지는 이것들은 과연 어디로 사라지는 것일까? 삶의 extra이면서 동시에 extra가 되어서는 안 되는, 이 미술이라는 까다로운 조건 자체가 바뀔 수는 없는 것일까?


     다행스럽게도 최근에 주변에서 일어난 일 중 이러한 흐름에서 삐져나온 보풀 같은 움직임이 있었다. 얼마 전 친구가 참여한 단체전에서 나는 작은 실마리를 감각했다. 전시는 사회가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자신의 자리를 만들자는 취지에서 여성 예술인들이 모여 기획한 금속공예전이었고, 연대를 통해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 가자는 의도는 유의미한 파동을 생성하는 하나의 생명력으로 다가왔다. 나의 지인은 착용이 불편한 장신구를 제작함으로써 신체에 관여하는 문화와 신체에 내재한 본성을 드러내는 작업을 해 왔으며, 이번 전시에서는 인간이 쓸 수 없는 장신구를 선보였다. 문명 이후를 연상케 하는 하늘 사진을 배경으로, 작품에서 느껴지는 보존성과 유용함, 인간의 미적 욕망과 관련이 없는 미감은 알 수 없는 안온함을 주었다. 케이터링 또한 세심하게 고려되어 다과는 모두 비건으로 제공되었다. 전시를 보러 온 모두가 불편함 없이 먹을 수 있는 음식과 최소한의 희생을 지향하는 방식은 잔잔한 감명을 주기에 충분했다. 타자의 고통에 대한 성찰로부터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는 장을 가늠하고 자신이 발휘하는 영향의 질을 개선하려는 노력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날을 세우고 칼을 휘둘러야 하는 난세를 진정할 긍정적인 힘이다. 사실 도의적인 이유를 제하더라도 음식이 맛있어서 한 번 더 감동했고, 간만에 편안한 친구들과 함께 평온한 마음으로 웃을 수 있어 좋았다. 제 감각을 무시하기를 강요당하며 현대를 살아내는, 쓸쓸함을 많이 타면서 홀로 있는 시간이 많은 예술인들에게 안전한 사람과 장소, 음식의 감각은 큰 효능을 발휘한다.


     정리하자면, 작업을 하면서 죽지 않는 방법으로는 가능한 덜 위험한 재료를 덜 위험한 방식으로 가공하기. 열악한 노동 환경 개선하기. 성과 중심주의적인 자기 학대를 그만두고 누가 세웠는지 모르는 엄격한 기준 완화하기. 과로하지 말기 등이 있다. 자기 신체와 정신을 온전히 통제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환상은 위대한 영웅들의 신화에 힘입어 그 영향력을 강력하게 발휘한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철저 한 자기 통제로써 홀로 극복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게다가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우리는 육신에 깃들어 있는 존재이고, 생명체는 머릿속 이상(理想)의 진취적인 과속보다는 자연이 부여한 성장의 단계를 차근차근 밟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정신과 육신의 한계가 무엇으로든 극복되기 전까지는 자신을 학대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하자. 이에 더불어 독성을 가진 화학 물질의 적절한 규제, 안전한 작업 공간 지원 등의 제도적 개선과 지나친 경쟁 체제로 인해 개인에게 가중되는 부담을 완화하는 것은 앞으로 지향해야 할 공동의 작업이다.


     남을 죽이지 않는 방법으로는 앞서 말했던 사례에서처럼 작업의 위험을 남에게 전가하지 않기. 빈곤한 자원을 두고 벌어지는 경쟁 체제 속에서 다투지 않고 함께 연대하기. 동물과 식물, 자연환경과 더불어 공존하는 법 찾기 등이 있을 것이다. 이에 더하여 자신이 사용하는 재료-사회와 환경의 응집물-들이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해체되어 흘러가는지, 자신이 무엇에서 영향을 받아왔고 어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한 번쯤 고민해 보았으면 한다.








     작업을 하면서 생활이 망하지 않는 방도에는 무엇이 있을까. 인디밴드 ‘브로콜리 너마저’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들이 음악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비록 음악과 관련된 일은 아니었지만 다른 일로 돈을 벌 수 있었던 덕분이라는 말을 했다. 미술에서 역시 작업으로 돈을 버는 것은 인지도를 가진 극소수의 작가들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호시절도 아니다. 2019년의 대한민국에서 작업을 팔아 생활을 온전히 책임질만한 돈을 벌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예술에 관심 없는 사회적 분위기에 반비례하여 해마다 필요 이상으로 배출되는 미술 대학 졸업생. 넘치는 스펙을 가진 이들로 이미 과포화된 제도권의 안과 밖.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작업을 지속하고자 하는 절대다수의 예술인에게 작업 이외의 직업은 개인적 삶의 기반을 마련할 필수 노선일 것이다. 유쾌하게 생각해 보면 업이든 취미든 예술 이외에 집중할 일을 만드는 것은 한쪽의 실패에 쉽사리 매몰되지 않는 균형추가 되기도 한다. 아무튼 사회적 가치를 생산하고 그 대가로 돈을 교환하는 일반적인 ‘직업’의 정의로 자신을 패배자로 정의 내리는 것은 이제 그만두자. 직업을 하나 더 가진다는 것은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생존의 방도 정도이기에 멋진 돌파구를 제시하지 못하는 것은 유감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는 좀 더 고민해야겠지만, 일단 뾰족한 수가 없는 나로서는 생활의 부피와 표면적을 최소화한 소인으로 살면서 일과 삶의 균형 잡기를 시도하게 될 것 같다. 그리고 덧붙여 휴식시간을 가능한 확보하고, 이에 불안감과 죄책감을 짐 지우지 않는 것 또한 부탁하고 싶다. 


     이러한 모든 조건을 고려하면서 동시에 작업이 망하지 않는 법을 찾는 것은 분명 많은 이가 주목할 만한 작업을 만들고, 제도권에 진입하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까다로운 일일 것 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고민이 유의미한 작업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고 가늠한다. 이 글에서 언급한 지점들은 예술가의 자율성을 제약하기 위함이 아니고, 치열한 자기 통제 하에서 무리하는 이에게 또 하나의 짐을 지우려는 것이 아니며, 사회적 문제를 예술가 개인의 노력과 능력, 체력과 정신력으로 극복하려는 무리수도 아니다. 이는 오히려 주어진 사고의 담벼락에 관한 이야기다. 기나긴 예술의 역사 동안 예술가들 은 예술과 비예술, 예술과 삶을 넘나들고 그 경계를 바꾸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해왔다. 우리는 우리가 결정하지 않았던, 우리에게 주어진 ‘예술’과 ‘예술 너머’에 대해 고민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새 시대의 젊은 작가가 기성의 세상에 제안 해 볼 만한 어떠한 사유(思惟)일 것이다. 결국은 어쨌거나 지속 가능한 삶에 대한 이야기다. 내가 죽거나 남을 죽이지 않고, 생활이 망하거나 작업이 망하지 않는 공동의 길을 찾기를 바란다. 그리고 혹여 작업을 지속하는 길을 찾지 못하더라도, 결국에는 괜찮을 수 있기를.















1. 자진(自進): 남이 시킬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나섬

2. 자진(自盡): 1. 스스로 자기의 목숨을 끊음 

                    2. 물기 따위가 저절로 없어짐 

                    3. 온갖 정성을 다함

3. FRP: 섬유강화플라스틱(fiber-glass reinforced plastics)의 준말. 불포화 폴리에스테르 등의 플라스틱에 유리 섬유를 넣어 강화한 것이다. 불포화 폴리에스테르 수지는 액체 상태의 주제와 경화제를 혼합하여 성형하는 재료로, 탤크를 섞어 묽기를 조절하기도 한다. 환경호르몬 등 인체에 유해한 물질을 포함하고 있어 외국에서는 사용이 엄격히 제한되어 있다. 작업자들은 주로 ‘폴리’라고 줄여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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