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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신 Dec 08. 2020

No hands to shake hands

김승규 개인전     2020. 11. 28 - 12. 11


김승규 개인전

2020. 11. 28 - 12. 11

Gallery175



말하는 사람은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찾고 있다. 그의 말들은 타인을 향하는 촉수이며, 

비록 이 말들이 문제의 기능에서 선택될지라도, 그 우선적인 의도는 타인에 의해 이해되는 것이다.

빌렘 플루서, 『몸짓들: 현상학 시론』, 안규철 역, 2018.



그림이 말이라면, 김승규의 그림의 말투란 무엇일까.

그의 첫 개인전 《No hands to shake hands》는 선언이 아닌, 시도들로부터 시작된다.


        과거 Aria 연작에서 작가는 화면에 사물을 흩어놓아 시선이 주변부로 흔들리도록 만들었다. 깊이가 다른 공간들은 어그러지고 덧대어졌으며, 어긋남을 은폐하는 사물들이 그림에 등장했다. 이 때문에 화면에 도달한 최초의 시선은 자리에 머물지 못하고 옆으로, 혹은 반대편으로 배회하게 되었다. 이처럼 시선이 화면 위를 맴돌게 하는 구도는 기원을 알 수 없는 사물과 더불어 의미를 떠돌게 하는 장치로 기능해왔다.


        이전 작업이 드로잉과 사진을 참조해 조밀하게 구성되었다면 최근 작업은 곧바로 캔버스에 그려진다. 세로로 긴 화면의 비중이 늘어나면서 좌우로 넓게 흔들렸던 초점이 모여들었고, 얕아진 표면으로 이미지가 가까워졌다. 묘사를 위해 사용되거나, 평면적 요소로 등장하던 붓질은 점차 그림의 공간을 떠다니게 되었다. 아크릴에서 유화로 매체가 바뀌면서 붓질이 뭉그러지고 흘러내리며, 생채기와 같은 흔적이 나타나 물감층이 불분명해졌다. 이로써 단음의 무수한 조합으로 만들어진 변주곡은 백색소음의 흐릿함이 되었다.


        그의 그림과 정반대의 말투로 적힌 문장이란 아마 최근 더욱 빠르게 문법을 확립해가는 포털사이트 뉴스의 표제일 것이다. 지나치게 명료한 이 언어는 비하와 찬양의 첨단을 달린다. 무언가를 즉시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를 닮은 언어. 도구화하고, 도구가 되고, 폐기되는 언어. 질문 없는 물음표, 느낌표로 가득 찬 언어. 이 언어는 신속히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이내 곧 서로를 까마득하게 갈라버린다.


        이에 반해 김승규의 그림은 이미지로써 언어를 망설이게 하고, 주장하기를 미룬 채 입을 다문다. 명확히 말할 수 있는/없는 것을 다른 언어로, 다른 이의 입을 거쳐서, 본래 하려던 말이 아닌 것처럼 어눌하게 얼버무린다. 그의 그림은 연필로 쓴 글씨를 연필심 반대편의 작고 단단한 지우개로 지우려다 번진 얼룩을 닮았다. 이에, 문장은 온점으로 마무리되지 못하고, 열어 둔 괄호는 끝내 닫히지 않는다.


        그러나 인터넷 기사와는 다른 속성을 지녔음에도 그의 그림은 온전한 평화의 토론장을 구현하지 못한다. 그것은 평화의 토론이란 지극히 모순적인 유토피아이기 때문이며, 또한 그가 어떠한 주장에 아무런 반박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수긍도 이의도 드러내지 않는 이 같은 어눌함은 문득 노련하게도 느껴진다.


하나 이로 인해 그림에는 구멍과도 같은 공터가 조성된다.

        공터로부터 존재는 불쑥 튀어나온다. 화면에 등장한 존재들은 바로 앞의 허공을 바라보거나 옆얼굴을 보일 뿐, 고개를 뒤로 돌리는 일이 드물다. 얼굴 없는 이조차 자신의 정체 없음을 내밀어 보인다. 이들은 애매한 피부 엉거주춤한 자세로, 풍경과 함께 우두커니 서 있다.


        아래로 뻗은 발이 바닥의 깊이를 알지 못하는 것처럼, 나무와 풀은 뿌리 없이 들판을 부유하고 사물들은 플라스틱이 불에 닿은 것처럼 우그러들거나, 물고기의 입술처럼 열렸다가 오므라든다. 이렇게 그려진/지워진 존재는 그림에 주인 없는 지문들을 무수히 남긴다.


        공터의 사람들은 몸을 누일 곳을 찾아 헤맨다. 이들은 허공에서 나타나고 또 어디론가 다시 사라진다. 그러다 간혹, 누군가와 어깨를 스치거나 잠시 을 맞잡기도 한다. 하나 서로는 마주한 손바닥을 볼 수 없기에 상대에게 영원한 미지의 영역으로 남는다. 때문에 이들은 몸을 드러냈을 때와는 정반대로, 차라리 자신의 손을 감추어 버린다.


        그렇다면 손은 어디로 갔는가. 달팽이의 눈과 말미잘의 촉수를 닮아 닿자마자 움츠러들어 더 깊은 몸속으로 사라졌는가. 휴지처럼 비에 젖어 가라앉거나, 조약돌처럼 마모되어 작아졌는가. 혹은 성급히 흐른 코피를 훔친 듯 지워져, 남아, 흐려졌는가. 아니면 돋아난 싹이나 잘려 나간 나뭇가지로, 풀숲에 흩어져 발치에서 우리를 응시하는가. 그도 아니면 여전히, 손목 끝에 남아 감각 없이 바람에 흔들리는가.


        김승규는 그 손으로, 보이지 않는 손으로, 보이는 손들을 줍거나 내버려 둔 풍경을 관객 앞에 내밀어 보인다. 버릇이나 습관처럼, 손에 쥔 연장(鍊粧/延長)으로 그리고, 묻고, 불을 지핀다. 작가가 마주한 벽에는 망설임이 자주 습기처럼 배어 나온다. 하나 어찌할지 모르는 당혹감에도, 매번 손을 내밀게 되는 까닭은 그럼에도 마주해야 하는 것들이 여전히, 새롭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윤형신




이 글은 김승규 작가의 첫 개인전 《No hands to shake hands》의 서문입니다.


2020. 11. 28 - 12.11

12시 - 18시(월 휴관)
갤러리175

서문  윤형신

디자인  김소정

주최  갤러리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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