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 근교에 자리한 디아비콘에 시에 테칭(謝德慶, Tehching Hsieh)의 대표작 여섯 점이 ‘회고전’의 이름으로 전시되었다.1) 1950년 타이완에서 태어난 시에 테칭은 타이완에서 퍼포먼스 담론과 실천이 활발하지 않던 시절 퍼포먼스에 도전했으며, 뉴욕에서 실행한 ‘생애 퍼포먼스’의 실험성을 인정받아 퍼포먼스 아트의 선구자로 지목된다. 시에가 미술계에 이름을 알린 작업은 생애를 작업에 오롯이 투자하여 생의 시간과 작업의 시간을 동기화한 ‘생애 퍼포먼스’다. ‘생애 퍼포먼스’는 여섯 차례의 퍼포먼스, 즉 삶의 조건을 설정하고 1년간 수행을 이어 나간 다섯 차례의 ‘일 년 퍼포먼스’와 13년간 예술을 하되 발표하지 않은 〈13년 계획〉으로 구성된다. 기획은 시에를 오랫동안 연구한 큐레이터 에이드리언 히스필드가 참여했으며, 전시는 히스필드가 작성한 시에에 관한 최초의 단행본 「Out of Now」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그 때문인지 퍼포먼스 영상 기록을 제외하면, 전시는 대체로 책이 기술한 서술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간 질적으로 높다고 평가되는 작업을 미니멀한 방식으로 전시해 온 디아비콘 다운 태도로도 보였다. 하지만 필자가 아는 바 작가는 대표작 이전에도 다수의 회화를 제작하고 실험적 퍼포먼스를 행했다. 이번 회고전은 그의 주요 작업에 집중할 자리를 만들었으나, 여타 작업을 적극 소개하지 않아 아쉬움을 남겼다.
더불어 시에가 여섯 퍼포먼스를 도출한 데에는 타이완 시절의 영향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이 전시 구성에서 생략되었음을 짚어야 한다. 필자의 연구에 따르면 기존 화단의 폐쇄성에 반발한 작가들이 태동한 타이완의 모더니즘은 시에의 초기 작업과 예술에 관한 관점에 영향을 주었다. 작가는 냉전과 계엄령으로 억압된 분위기 속에서 야수파, 입체파, 표현주의 등을 비롯한 서구 미술과 당시 타이완에 유행한 실존주의 문학을 받아들였고, 의무 군 복무 시기에는 군의 폐쇄적인 분위기에 영향을 받으며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시에는 개인전을 열고 나서 충분한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여겼으며 회화가 자신의 실험 정신을 펼치기에 불충분하다고 느껴 퍼포먼스 아트라는 새로운 돌파구를 꾀했다. 타이완에서의 퍼포먼스는 실존의 위기에 처한 존재와 육체성, 시간의 흐름에 관한 작업이었다. 그 밖에도 그는 미국의 액션 페인팅, 해프닝을 비롯해 일본의 구타이 그룹 등의 정보에 간접적 영향을 받았으리라 보인다. 시에는 계엄령으로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은 타이완을 벗어나, 급진적 퍼포먼스를 도모하기 위해 1974년 미국에 밀입국했으며 넓은 무대이자 예술의 중심지라 여긴 뉴욕에 다다랐다. 그리고 〈1/2톤〉, 〈오일 파스텔〉, 〈구토〉, 〈분뇨통〉 등 자학적 퍼포먼스를 진행하며 실존적 탐구의 여정을 계속했다. 이러한 퍼포먼스들은 타이완에서부터 형성한 실존적 고뇌에 찬 인간상의 표현이자 이주민으로서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민, 타이완과 미국에서 받은 사회적 압력에 대한 갈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작업실에 홀로 고립되어 생각을 되뇌다 발상한 첫 번째 ‘일 년 퍼포먼스’인 〈감옥 작업〉과 일련의 퍼포먼스를 도출한 계기가 되었다.
작가가 도미 이후 미등록 이주민으로 지내던 시절 여타 중화권 이민자들과 관계를 맺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전시 서문은 시에와 관련이 있는 예술가로 솔 르윗과 온 카와라, 한네 다보벤을 언급하며 서구에서 이미 정전이 된 작가들과의 맥락에서 작업을 서술했다. 그러나 이번 오프닝에서 작가 본인은 뉴욕에서 타이완 작가들과 소통하고 있었음을 이례적으로 밝혔다. 추가로 필자의 조사에 따르면, 시에가 정착한 소호는 중국, 타이완, 홍콩 출신 이민자 다수가 거주하는 차이나타운 인근이었으며, 중화권 이민자들은 작가의 생활과 작업에 도움을 주었다. 그와 관계한 예술가 중에는 장차 세계적 명성을 얻는 아이 웨이웨이, 프록 킹 궉, 쉬 빙 등이 있었다. 이들과의 관계는 사적인 영역으로 밀려나 왔으나, 작업을 재독하기 위한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을 간략하게나마 논한 의도는 시에를 정체성의 표상으로 환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유의 역사적 조건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이번 디아비콘에서의 회고전이 ‘완성도 높은’ 작업으로만 구성되고, 미국의 정전에 오른 작가에 국한하여 논의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시에 본인이 여섯 퍼포먼스의 완결성을 중요시하여 습작을 거의 숨기다시피 했다. 여기에는 작품의 역사성보다는 예술성과 질을 중시하는 고전적인 태도가 깃들어 있다. 또한 의미가 국가 및 소수자 정체성으로 국한되기를 피하려는 작가의 의도를 큐레이터가 반영한 것으로도 보인다. 하지만 정체성 표명이 시에의 궁극적 목적이 아니었다 할지라도, 그는 타이완과 미국 내외부의 분위기로부터 단절된 채 갑자기 새로운 작업을 창안해 내지 않았다.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보편으로 읽히기를 바라는 작가의 의도가 역사적·지역적 관점의 독해와 충돌한다고 볼 필요는 없다. 그러한 독해는 오히려 작업의 보편성이 공감받는 계기가 될 뿐만 아니라 보다 넓고 풍부한 해석을 가능케 할 것이다. 작업을 1970-80년대 미국 동부의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면, 그의 출생지인 타이완 난추나, 그와 동시대에 퍼포먼스 아트를 펼친 한국의 맥락에서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여타 형식주의 예술가들의 작업이 ‘서구 백인 남성’과의 연관하에 연구된 지도 시간이 흘렀다. 시에의 작업에서도 지역 및 역사적 맥락을 생략하기 보다, 작가가 실존주의적 보편성을 화두로 가져온 역사적 계기와 그가 비서구인 유색인종 남성으로 자리했던 시공간을 되짚는 방식이 대안이 될 수 있다.
1) 시에 테칭(謝德慶)은 영미권에서는 Tehching Hsieh, 한국에서는 그를 음차한 ‘테칭 시에’로 불려 왔다. 그러나 이 글은 시에의 타이완 시절과 미국 내 중화권 출신 작가들의 교류를 논의하기에 출신지에서 사용되는 성-이름 순서로 적고자 한다.
본 원고는 아트인컬처 2025년 1월호에 실리기 이전, 잡지 편집부의 편집을 거치지 않은 원본입니다.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으니 인용 시에는 출처 표기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