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의의 사계』

현승의 작가의 작업에 대한 비평문

by 형신

「큐레이터님께」


이 글은 현승의 작가의 개인전 《올모스트 파라다이스》1)를 무대로 삼는다고 가정하여 쓴 연극 대본입니다. 일반적인 비평의 형식을 쓰지 않은 이유는 현승의 작가의 작업은 답변을 요하는 발화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작가의 작업을 뚜렷한 언어로 규정하기 보다, 그의 발화를 잇는 것이 더욱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현승의 작가의 그림이 그렇듯, 글의 일부는 제가 직접 보거나, 듣거나, 겪은 일이 아니라 미지의 순간에 일어났거나 일어날 일을 상상한 것입니다. 글에는 실존인물인 작가 현승의와 비평가인 저, 현승의의 어머니이자 화가인 홍진숙은 물론, 제 고모에게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낸 가상인물 윤옥선이 나옵니다. 인물들은 제가 쓴 대본을 바탕으로 자기 자신을 연기합니다. 그렇기에 대사는 과거의 이들이 겪었고 말했던 사실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가상의 연극을 더욱 사실로 느껴지도록 가상의 포스터를 구상했습니다. 포스터는 관광지 사진 속 사람들의 자리를 공백으로 처리한 현승의의 그림, 천지연 폭포에서 마스크를 쓰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그린 홍진숙의 그림, 노동자들의 빈자리를 암시하는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앨범 표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세 이미지는 액자 속 액자처럼 서로 겹쳐지며,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를 또 다른 액자 안의 그림으로 보게 합니다.


환영인 이 글이 일말의 진실을 담기를 바라며,


윤형신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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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의의 사계」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하얀 나비 꽃 나비 담장 위에 날아도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2)


승의의 그림을 배경으로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사계가 오디오로 흘러나온다. 일견 경쾌한 듯 들리지만 단조로 구성된 가락이 구슬프기도 하다. 승의, 형신, 진숙, 옥선이 작은 목소리로 각자의 속도에 따라 노래를 부른다. 노랫가락은 하나로 합치되지 않고 이어지고 끊어진다. 무대 앞쪽에 조명이 비추어지며, 각기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인물들의 대사가 시작된다.


형신: 오른손이 동쪽에 있으니 저쪽은 서울이다. 나는 이 섬을 떠날 것이다.

진숙: 제주는 내가 이제껏 살아왔고 살아갈 것이며, 우리의 아이들이 살게 될 곳이다.3) 나는 화가고, 내 딸 승의 또한 화가지만, 그 애는 지금 서울에 있다.

승의: 나는 서울에 있지만 섬사람이다. 나는 제주에 돌아가기 위해 서울에 왔다.

옥선: 장녀로 자란 나는 딸린 남동생이 셋. 동생들을 공부시키려면 서울로 가야만 한다.


형신, 옥선, 진숙이 무대 앞쪽에서 제 자리로 돌아간다. 승의는 자신이 그린 〈코코넛이 있는 풍경〉4) 앞에 선다. 진숙은 천지연이 담긴 승의의 그림 〈아름다운 내일이 기다려〉5) 앞에서 낙엽을 모은다. 옥선의 재봉틀 소리를 배경으로 형신이 캐리어를 끌며 무대 앞으로 나온다.


형신: 나는 이제 내가 자란 제주에 갈 때면 칫솔과 캐리어를 챙겨 갑니다. 물로 둥글게 둘러싸인 섬. 제주는 나에게 떠나오고 싶은 곳이었어요. 아는 사람들만 가득한 여긴 지긋지긋해. 내가 태어난 서울로 다시 갈 수 있다면. 나는 제주에 살 때 서울이 아주 큰 도시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제주도의 삼 분의 일정도 밖에 되지 않더군요. 이 좁은 땅에 인구의 절반이 살잖아요. 그래서일까, 작은 면적이지만 서울에는 별것이 다 있습니다. 제주 맥주. 제주 흑돼지 전문점. 제주 말차 라떼. 제주 동백꽃 핸드크림 등. 내가 제주에 있을 때만 해도 제주 맥주 같은 건 없었는데. 가끔 편의점에서 제주 맥주를 마셔보지만 그다지 제주가 떠오르지는 않아요. 제주의 맛은 무엇일까요. 공장에서 각종 인공향료로 조제한 트로피칼한 맛인 걸까요. 아니면 할머니가 해준 푸진 맛, 갓 잡은 횟감의 싱싱한 맛인 걸까요. 서울 사람들은 제 고향도 아니면서 제주를 그리워합니다. 심지어는 가본적 없는 사람들도요. 이 도시는 자기 아닌 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서도, 이국을 그리워해요.


승의의 맨발에서부터 조명이 점차 얼굴로 비추어진다.


승의: 몇 년 전보다 바닷물이 따듯해졌어요. 따듯한 파도에 배를 허옇게 뒤집은 물고기가 쓸려옵니다. 민들민들하고 뜨듯한 죽음. 물고기는 눈꺼풀이 없어 눈을 감지도 않고 바닷속에 있어 눈물을 흘리지도 않아요. 그를 손에 쥔 나만이 인간다운 방식으로 슬퍼할 뿐. 제가 겪어온 무수한 삶의 결들 속에서 바다가 배제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6) 저는 2년 전, 인천에 있었고, 그곳에서도 바다에 대한 그림을 그렸죠. 그림에 대해 안담 작가가 써준 글의 제목은 「토막살海_물은 나뉘지 않는다」7) 였습니다. 제주의 앞바다를 내다보며, 인천의 앞바다, 후쿠시마의 앞바다가 연결되어 있음을 떠올립니다. 연결된 물이 다시금 국경으로, 지경으로, 양식장으로 나뉘며 굳어감을 떠올립니다. 그를 생각하며 바다를 내다봅니다. 바다 한 가운데 폐그물인지 해초인지 모를 것이 거무튀튀한 것이 떠 있습니다. 어쩌면 폐그물과 해초, 바다 거품과 온갖 유기체들이 뒤섞인 덩어리일 수도 있겠죠.


진숙이 정방폭포를 액자식 구성으로 그린 승의의 가장 큰 그림 〈아름다운 내일이 기다려〉 앞에 있다. 진숙은 품에서 자신의 또 다른 폭포 그림, 〈천연사후〉8)를 꺼낸다.


진숙: 천지연은 제주의 관광명소입니다. 300년도 더 전에 제주의 지도를 그린 김남길 화공 또한 천지연을 그렸습니다. 그러나 천지연이 오늘날과 같은 관광 명소가 된 데는 채 몇십 년이 지나지 않았어요. 나는 김남길 화공을 따라 그림을 그리려 천지연을 방문했습니다. 코로나로 해외여행이 차단되어 많은 사람들이 제주도로 몰려오던 나날이었습니다. 마스크를 낀 이들이 천지연 곳곳에 있었습니다. 위기가 닥칠수록 자신의 존재와 행복을 증명하려는 욕망은 사그라들지 않는 걸까요? 내가 여기에 있었음을 증명하려는 사람들처럼, 나는 천지연을 이루는 나뭇잎들이 여기 있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나뭇잎에 물감을 묻혀 그림에 도장처럼 찍었습니다.


승의가 〈아름다운 내일이 기다려〉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말을 꺼낸다.


승의: 학창 시절 제주에서는 언제나 한라산 오르기가 체험활동으로 있었습니다. 학교에서는 한라산 정상에 오르면 좋은 대학에 가거나, 원하는 성적을 얻는 등 다른 일들도 척척해낼 거라고 믿는 것 같았습니다. 드높은 산을 오르는 행위는 왜 성취와 연결이 되는 걸까요. 무언가를 성취하는 인간의 태도는 자연을 정복하는 태도와 맞닿아 있는 걸까요. 이 밖에 제가 신기하게 여겼던 한라산의 이미지가 또 있습니다. 그건 공사장을 가리는 철벽을 꾸미기 위해 붙인 한라산 이미지였어요. 공사장에 아름다운 한라산 사진을 부착하면 우리의 행위가 더욱 아름다워지는 걸까요. 우리는 공사를 통해 더욱 제주스러운 공간을 꿈꾸는 걸까요. 정복의 대상으로서의 한라산, 환경미화 이미지로서의 한라산. 그런 의미에서 한라산의 이미지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이 덕지덕지 투영된 껍데기라 할 수 있습니다.


옥선이 승의의 〈아름다운 내일이 기다려〉를 배경으로 서 있다. 그림의 손들은 절단되었으며 얼굴을 가지고 있지 않다. 내뻗는 손만 있을 뿐 맞잡는 손이 없다. 옥선이 ‘가리키는 손’, ‘뻗는 손’, ‘펼친 손’, ‘웅크린 손’, ‘떠는 손’을 발음하며 하나씩 펼쳐 보인다.


옥선: 가리키는 손. 뻗는 손. 펼친 손. 웅크린 손. 떠는 손. 서울에서 일하는 나는 산업 역군. 제가 일하는 구로 공단에서는 절단된 손가락이 달에 한 가마니씩 나온다는 괴담이 돕니다. 괴담은 한편으로는 가짜지만 한편으로는 진실입니다. 며칠 전 제 친구가 밤늦게 일을 하다 미싱 바늘에 손을 찔렸고, 다음날이 밝아서야 병원에 갈 수 있었거든요. 마찬가지로 저는 하루에 4시간씩 자며 일을 합니다. 미싱질이 손에 익었지만 늘 피곤하고, 피곤은 실수를 만들어냅니다. 바늘에 찔리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작업장 천장의 형광등 불빛이 매섭습니다. 매서움 아래 뜨겁고 차가운 계절이 하나 둘 지나갑니다.


옥선이 재봉틀로 다시 돌아간다. 승의는 각목으로 세워진 〈사랑의 이름으로〉9)의 앞으로 이동하며 덤덤하게 대사를 시작한다. 옥선의 재봉틀 소리가 끊어질 듯 이어지며 되풀이된다.


승의: 어렸을 때 어머니와 함께 갔던 들불축제를 생각하면 갖가지 냄새가 떠오릅니다. 들불의 매캐하고도 고소한 냄새가 사방 천지에 진동하고, 모여있는 사람들 사이에는 지글지글 익어가는 통돼지 구이의 기름 냄새가 풍겨 올랐죠. 어느 여행지에서나 볼 수 있는 간식이겠지만, 특별한 하루를 기억하려 나온 제게는 아이스크림의 바닐라 향이 특별하게 남아있어요. 과거 들불축제는 오름을 더욱 풍요롭게 하기 위한 의식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들불축제의 유효성이 의문을 받고 있습니다. 불을 더욱 잘 붙이기 위해 뿌리는 휘발유로 인한 토양 오염, 태우는 행위로 발생하는 대기 오염과 같은 환경 문제가 대두되었기 때문입니다. 저와 같은 기억을 가진 누군가에게 들불축제의 중단은 유년 시절 추억의 삭제나 전통과의 단절을 뜻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우리를 둘러싼 불이 어디서 왔나를 떠올리게 된 지금, 그 기억을 돌아 보면 휘발유 냄새가 불길한 잔향으로 감도는 듯합니다. 이 세상은 흑과 백으로 나뉘지 않을 만큼 무수히 많은 회색 톤처럼 복잡하고, 복잡한 삶의 방식 속에서 생을 지키는 일은 요원해 보입니다. 사라지는 것, 지켜지는 것 모두 사랑의 이름으로. 터전을 사랑하는 그 많은 방식과 매캐한 연기에 찬사를.10)


형신 또한 승의의 옆에 선다. 그러나 그를 바라보거나 말을 나누지는 않는다. 형신의 말이 이어진다.


형신: 때는 제가 초등학교 4학년이었을 때, 모든 것이 갈색으로 변해버린 겨울이었습니다. 저 또한 어릴 적의 현승의 작가처럼 들불축제에 자주 갔었죠. 들불축제의 가장 강렬한 기억은 불이 다 타버린 이후에 진행된 불꽃놀이입니다. 주최 측의 잘못인지 모르겠지만, 불꽃놀이가 너무 가까이서 진행되는 바람에 하늘로 가야 할 불꽃이 우리가 앉아 있는 땅까지 와닿았어요.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했을 때에, 현승의 작가가 그린 폭죽, 혹은 소행성을 연상케 했죠. 그 불꽃은 아름답지만 무섭기도 했어요. 불꽃에서 떨어진 불똥이 패딩에 구멍을 낼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었거든요. 무언가가 아름답다는 감각은 그것이 물리적으로, 감정적으로 적당히 먼 곳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지 모릅니다. 우리의 눈앞으로 닥쳐온다면 그건 아름다움이 아니라 위협이겠죠. 어쩌면 우리가 바라보는 오늘날의 풍경은 제가 어릴 적 경험한 불꽃놀이처럼, 연기를 내며 떨어지는 현승의 작가의 불꽃처럼, 모든 것을 관망하기에는 너무나 가까이 있는 것일지 모릅니다.


승의: 우리는 위기에 너무나 가까이 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풍경은 더 이상 안전하게 보이지 않고 이상한 느낌을 자아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과거의 환경 파괴, 노동자의 착취, 생명의 경시가 오늘날까지 이어져온 것에 비해, 과거와 현재에 존재하는 우리는 만날 수 없는 상태로 있습니다. 제주를 떠나 다칠 위협을 무릅쓰고 젊음을 바쳐 국가의 부흥을 이끌었던 옥선. 제주를 그리며 작업실에서 고립된 채 계획한 작업을 해나가는 저는 어떻게 서로를 만날 수 있을까요. 제 그림 속 잘린 손들, 어딘가로 뻗어져 나가는 손들은 어떻게 서로를 맞잡을 수 있을까요. 독백으로 남겨질지 모르는 우리의 대사는 어떻게 얽힐 수 있을까요. 다음의 말, 그다음의 말은 어떻게 지속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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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큐레이터님께」


현승의 작가의 그림들은 묻습니다. 다음의, 그다음의 대사를 알고 있느냐고요. 저는 대본을 썼지만, 절실하게 묻는 작가의 작업에 걸맞은 답변을 갖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작가와 만나지 않았던, 만날 수 없었던 존재들을 불러옴으로써 우회적으로나마 답해보고자 했습니다. 저는 현승의라는 사람이 작업의 규모를 스스로 보관할 수 있는 정도로 제한하면서까지, 화판조차 사들이지 않고 종이를 말아 보관하면서까지, 세계에 대해 원죄와 같은 감정을 가진 이유가 의아했습니다. 오름을 불태우는 손이 구름 속에서 등장하는, ‘사랑의 이름으로’라는 그림에 담긴 절망은 어디서 온 것인가. 하늘에서 등장하는 손은 수많은 종교에서 구원을 뜻해오지 않았는가. 어째서 현승의라는 사람은 고통스러운 재현을 계속해서 반복하는가. 그의 그림에서는 모든 것의 너머를 보고 있다는 우월감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공감을 얻으려 과장하거나 자기 연민에 빠지지도 않습니다. 그저 한 그림 속에 공존하기 어려운 것들이 병립하며 불편한 자리매김을 되풀이할 뿐입니다. 저는 그림의 모순이 작가가 〈사랑의 이름으로〉를 그리며 적은 말처럼, 사랑의 양면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례로 저는 제가 사랑하는 글을 쓰며 하루에 한 차례씩 배달 음식을 먹었어요. 환경과 노동 문제를 다루는 이 글을 쓰면서도 마찬가지였죠. 글을 쓰면서 생활까지 완벽하게 해낼 수는 없었기에 삶을 매일 같이 노동하는 타인에게 의탁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저는 기사님에게 감사의 의미로 음료수를 건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음료수는 잠깐의 호의로 휘발되고 구조적 문제는 남습니다. 저는 현승의 작가가 고통스러운 이유를, 그리고 제가 매일 음식을 시키며 죄책감을 느끼는 이유를 짐작해 보았습니다. 그건 어쩌면 이 세계를 아직은 아끼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랑은 너무 무겁기 때문에 아낀다고 표현하겠습니다. 작가의 죄의식은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지만, 모든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지 못하는 인간의 오만과 무능에서 옵니다. 사랑의 이름으로 인간은 자기 목숨을 버리기도 하지만, 타인의 목숨을 앗기도 하며, 같은 일을 같은 사람이 하기도 합니다.11) 스스로 만든 사회에서 원하든 원치 않든, 구조적 죄를 저지르는 우리에게 구원은 없을 것입니다. 다만 세상의 끝에 남아있는 것이 마침내는 사랑, 보다 성숙한 사랑이기를 소망합니다.


윤형신(기획, 비평)




1) 현승의 개인전, 《올모스트 파라다이스》, 2025,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이하 언급한 현승의의 작업은 이 전시에서 선보인 것들이다.

2) 노래를 찾는 사람들, 「사계」의 1절, 노래를 찾는 사람들2, 1989년 10월 1일. 1970~80년대 산업화 시기 공장에서 매일 밤낮없이 착취당했던 노동자들의 애환을 담은 노래로, 여성 재봉사가 화자다.

3) 홍진숙, 제20회 작품전 《탐라순력을 거니는 시간》 도록, 「작가노트」, 4페이지.

4) 현승의, 〈코코넛이 있는 풍경〉, 2025, 장지에 먹·파스텔·호분, 162.2×260.6cm.

5) 현승의, 〈아름다운 내일이 기다려〉, 2025, 장지에 먹·파스텔·호분, 202×659.5cm.

6) 현승의, 「애정과 절망의 표류기」, 2024에서 직접 인용. 작가 홈페이지: https://herworks.notion.site/Artist-notes-49ce8f795aa74272994cfa4c0159c899 (2026년 1월 11일 검색)

7) 안담, 전시 리뷰 「토막살海_물은 나뉘지 않는다」, 현승의 개인전 어쩌면 이게 마지막일지도 몰라 도록, 17-19페이지.

8) 홍진숙, 〈천연사후〉, 2021, 장지에 모노타이프·채색, 53×41cm.

9) 현승의, 〈사랑의 이름으로〉, 2025, 장지에 먹·파스텔·호분, 130.3×162.2cm.

10) 현승의, 〈사랑의 이름으로〉에 대한 작가의 작품 소개. 작가 인스타그램. @hyun_seung_eui https://www.instagram.com/p/DSCTFGYk4DZ/

11) 글 작가 안담이 적은 다음 글에 대한 오마주. “어쩌면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사람은 무엇을 하는가? 사람은 그림을 그리기도 하지만, 회를 흡입하기도 한다. 집회를 열기도 하지만, 카니발 축제를 열기도 한다. 이 모든 행위를 같은 사람이 하기도 한다.” 안담, 「토막살海_물은 나뉘지 않는다」, 19페이지.



이 글은 현승의 작가를 위해 쓴 비평문으로,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의 작가-평론가 매칭을 거쳐 작성되었습니다. 이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인용 시에는 출처 표기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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