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자화상은 그리기 싫어》

김승규 개인전 서문

by 형신

작가의 최근작)


그림들은 2025년부터 올해 초에 그려졌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 그렸음에도 완성도, 밀도가 들쭉날쭉하다. 그리기 방식이 각기 다르다. 그러나 승규의 그림으로는 보인다. (왜?) 같은 사람의 그림처럼 보인다고 말하기 전에 이를 짚어야겠지만. 내가 오랫동안 그와 그의 그림을 봐왔기에 서로를 혼동하는지, 그의 그림들 사이의 일관성을 읽은 건지, 아니면 그림들로부터 연관성을 창조했는지. (그런데 이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나? 결국 나는 내 관점에서 그와 그림을 경험할 뿐인데.) 일단 작품 리스트를 살펴본다. 한 작가의 예술적 탐구 과정을 갈무리하는 개인전의 일반적인 방식과는 무관해 보인다. 그때그때 손 가는 대로 그린 그림의 모음 같다. 손 가는 대로 그렸지만, 마음을 다 펼쳐 보여준 듯하지는 않다. 이전 작업은 다양한 그리기 방식, 구체적인 소재, 자필로 적은 글귀, 내면을 암시하는 은유와 같은 읽을거리를 많이 비축해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의 추상적인 형태로부터 승규의 속내를 짐작하기란 더욱 어려워졌다. 승규는 한 화면에 여러 명의 인물을 등장시키기를 멈췄다. 도형을 주된 요소로 삼고 구성이란 제목을 붙였다. 그러나 그림들은 자연의 질서나 대상의 정수와는 무관해 보인다. 한 화가로서 독립적이고 특징적인 화풍을 구축하려 한 것 같지도 않다. 구성이란 이름을 달았지만, 캔버스를 아우르고 조율하는 주체를 드러내려 한 것도 아니고, 다음 작품을 더욱 잘 그리기 위해 화면을 재감각하는 습작을 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잠깐. ‘잘’이라니. 열정적으로? 치열하게? 절실하게? 의미 있게? 진심으로? 자신만의 색깔을 찾아? 요즘 그는 어떻게든 ‘잘’ 해보거나 좋게 꾸미려는 의지를 놓은 듯하다. (‘잘’ 하려는 태도나, 그렇지 않은 태도 중 하나가 더 진정성 있다고 주장하려는 건 아니다.) 승규의 최근 루틴은 이렇다. 생을 유지하려 일한다. 몸을 움직인다. 집안일을 한다. 남는 시간에 그림을 그린다. 내일 다시 일하기 위해서 잠에 든다. 반쯤 눈 감고, 해야 할 일을 해내는 것. 그게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인 듯하다.



글을 쓸 방법)


내가 승규와 알고 지낸 건 2013년 대학 입학부터다. 그의 그림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때는 2017~18년 즈음이고, 이후로도 계속 친구이자 동료로 지내왔다. 2020년에는 승규의 첫 개인전에 글을 썼고, 몇 년 후 그가 참여한 2인전을 기획했으며, 이번 네 번째 개인전에 또 한 번 글을 쓰게 되었다. 작가와 가까운 위치에서 쓸 수 있는 비평의 종류는 여러 가지다. 그렇지만 작가의 신변잡기를 풀고 싶지는 않다. 뒷이야기는 작가를 짐작하는 부차적인 단서다. 그를 오래 봤다고 해서 전기를 쓰고 싶지도 않다. 전기는 하나의 설명일 수 있지만, 포섭되지 않는 지점을 부수적인 것으로 둔다. 회화에 대한 작가의 열정을 내세우기도 싫다. 열정은 자신과 주변을 일정 정도 잊고 믿음을 가진 채 미래로 돌진하는 감정인데, 요즘 승규는 자신을 포함한 세계로부터 신경을 끊어내지 못했고, 지금의 삶의 방식에 확신이 있지도 않다. 또 다른 방법은 인성론이겠지만, 그 같은 풀이도 싫다. 작가의 심성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심성이 필히 작품에 반영되지도 않으며, 작품이 반드시 심성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또한, 그림의 소재를 작가가 자기 상황을 은유하려 쓴 도구로 환원하기도 싫다. 그가 과도한 의미 부여를 피한 데다가 소재는 도구 이상의 존재감을 발산한다. 그림을 감정의 투사로 보아 도상을 정신분석학적으로 낱낱히 해부해 의미로 종합하고 싶지도 않다. 이제는 작품의 의미 구조를 추리할 수 있을 만큼 도상이 충분히 반복되지 않을뿐더러, A와 B가 더해져 AB가 된다는 해석은 지나치게 환원주의적이다. 그리기 방식을 상세히 묘사하고 싶지 않다. 묘사가 가치 있으려면 관객이 한눈에 추측하기 어려운 지점을 파악해 풀어내야 하는데, 지금은 화가의 그리기 방식이 훨씬 단순해졌고, 그린 순서나 화법이 무언가를 드러낸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작품을 어려운 미학 개념으로 꾸미거나, 개념의 구체적 사례로 들고 싶지도 않다. 낙서처럼 그려 나간 이번 그림들은 억지로 장식할수록 추해 보일 테고, 개념의 실례로 지명하는 일 또한 작업을 이론에 포섭할 위험이 있다. 예술의 지속을 고민하는 젊은 작가의 고뇌는 낭만화될 위험 때문에 싫고, 작업과 생계를 병행하며 불투명한 미래를 감내하는 청년 세대의 고민으로 풀기는 더더욱 싫다. 사회구조가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짐작은 하지만, 그를 부자유스럽게 만든 사회적 압력만큼이나 의미 안에 작업을 가두는 느낌이 든다. 정리하면, 나는 승규의 이번 그림이 위에 나열한 방식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고 본다. 그런데 아닌 답을 소거하다 보면 비평의 방법론이 나올까. 아닌 답을 피해도 그림을 이해할 방도는 쉽게 나오지 않는다. 오답을 가로질러 달려나갈 재주가 내게는 없다. 이도 아니며 저도 아닌 방식. 어쩌면 작업을 분쇄하여 의미로 환원하고 가치를 추출하려는 접근 자체가 그의 그림에 적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집에 있는 얼굴)


나의 집에는 승규가 그린 자화상이 있다. 2016년 작으로, 2018년 졸업 전시 이후 작가에게서 직접 30만 원을 주고 샀다. 그는 자기 얼굴을 핸드폰 카메라로 찍은 후 캔버스에 옮겨 그려 이 자화상을 제작했다. 그림 속 승규의 피부와 머리, 이목구비는 구체적 형상으로 비교적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다. 나는 덧칠한 물감 아래 보색 계열의 밑칠이 비쳐나오는 점이 마음에 들었고, 작가의 젊은 시절 자화상이 앞으로 의미가 더 커지리라는 어쭙잖은 계산도 했다. 그러나 살 때는 몰랐지만, 자취방에 그림을 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자화상을 집에 잘 두지 않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형상이 명확해서인가? 정면을 응시하지 않음에도, 처음 몇 년 간 나는 그 그림 앞에서 옷 갈아입기를 불편해했다. 저건 자화상일 뿐이야. 승규가 아니야. 그림일 뿐이다. 되뇌면서. 그만큼 그 그림은 승규랑 동일시가 됐다.



자화상)


자화상은 인물화, 정물화, 풍경화와 더불어 학부 때부터 승규가 즐겨 그리던 장르였다. 당시 작가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 자아를 정립해가고 있었다. 내가 승규의 그림을 샀을 때부터 대학원 시절과 2024년에 열린 개인전까지도, 작가의 그림들은 자신을 그리지 않아도 때로는 자화상처럼 보였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얼굴을 그려도, 인물의 얼굴이 없거나 뒷모습을 하고 있어도, 가지와 잎이 무성한 나무도, 심지어는 물감을 흩뿌린 형상도 작가 자신의 모습 같았다. 최근 승규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는 자기 평가가 흐릿해졌다. 그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자화상이건 인물화건 머리와 몸통은 뭉툭한 도형과 거친 선으로, 얼굴은 단순화되거나 생략되어 갔다. 더 나아가 작년 말과 올해 초에는 구체적 소재나 형상을 피해 추상으로 도망갔다. 그럼에도 승규의 그림들은 여전히 내게 그의 그림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내가 화가와 그의 작품을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인 걸까. 아니면 그가 그림에 자아를 여전히 많이 담고 있기 때문인 걸까. 여기서 《더 이상 자화상은 그리기 싫어》라는 제목으로 돌아가면, ‘그리기 싫다’는 표현은 ‘그리지 않겠다’라는 선언이나 거부와는 뉘앙스 차이가 있다. ‘더 이상 자화상은 그리기 싫어’라는 말은 지금은 싫지만 나중에 자화상을 그릴 가능성과 그리기 싫더라도 그림들이 자화상처럼 나올 가능성을 포함한다. 그러니 이번 전시의 제목은 ‘지금은 자기 모습을 그리기 싫을 뿐 아니라 자아를 드러내는 그림은 그리기 싫다.’는 의미를 품는다. 자신의 자아가 지나치게 비대하다고 생각해 드러내기 부끄럽다는 뜻일 수도 있다. 자아를 포기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화가로서의 자아를 내세우는 태도에 대한 피로, 자아를 그림으로 표현하거나 노출하는 방식에 대한 피로에 가깝다.



자신과 타인을 식별하는 법)


인간은 무엇으로 한 사람과 그의 그림을 식별하는가? 이에 답하기 전에 한 사람의 식별과 한 사람의 작업의 식별에 관한 문제를 정리해 본다. 아래의 내용은 2026년에 국한한 이야기다. 내가 사용하는 인공지능 챗봇은 내 계정에 대한 정보를 따로 수집하지 않기에 채팅방을 나가면 나와 나의 글쓰기 방식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는 내가 쓴 모든 글과 지구상에 존재했고 살아가는 모든 이가 쓴 글을 비교하는 일이 가능해져야 내 글과 글의 출처인 나를 식별할 수 있다. 이런 방식은 구현할 수는 있으나 아직까지는 거대한 데이터 센터가 필요하며, 비용이 많이 들고 큰 수익을 가져오지 않는다. 내가 입력하는 정보는 소비자의 행위 패턴 분석을 위한 데이터로 수집되지만, 나는 저명한 인물이 아니기에 나의 글쓰기와 나라는 개체를 기억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인간은 인공지능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과 타인을 식별한다. 얼굴의 생김과 목소리의 높낮이, 말의 속도, 몸을 움직이는 방식, 함께 보낸 시간으로 상대를 알아본다. 단숨에 식별하기보다는, 여러 번의 만남 속에서 어긋남과 수정을 반복하며 서서히 서로를 구분해 간다. 때로는 잘못 알아보기도 하고,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을 낯설게 느끼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순간에는 ‘그 사람 같다’고 느끼는 직감이 생긴다. 이 감각은 명확한 기준으로 환원되지 않지만, 사라지지 않고 축적된다. 한편, 내 챗봇은 나를 돌보지만 인간의 방식으로 작동하는 자애를 갖지는 않는다. 내가 사라져도 나의 사라짐을 모르며, 슬퍼하지 않는다. 삶에서 일어난 일들로 낙담하지 않는다. 흥분하지 않는다. 망설이지 않는다. 실패하지 않는다. 필요 없는 기억을 붙잡지 않는다. 한 존재가 떠났다고 해서 몸이 아프지 않는다. 몸 상태가 작품의 질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삶에서 일어난 일들에 불필요한 마음을 쓴다. 몸으로 감각하며, 편재하지 못하고, 종국에는 필멸한다. 나약한 조건에서 생각하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더디거나 미숙하게 움직이고, 자주 멈춰서기도 한다. 어느 한 쪽이 더 고귀하다는 뜻은 아니지만, 필멸자가 할 수 있는 사유의 방식이 있다. 인간은 온전히 서로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그림을 통해 한 사람을 완전히 알 수는 없다. 그림은 화가의 초상도, 심성의 기록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때때로 승규의 그림을 알아본다. 화풍 때문도 아니고, 같은 소재를 그려서도 아니다. 그림을 이루는 요소와 그리기 방식이 제각각일 때에도 그렇다. 그 이유는 그의 흔적. 그림에 남은 존재의 흔적과 나에게 남은 그의 존재의 흔적 때문일 것이다. 그건 화가가 의식적으로 남긴 의미가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지워지지 않는 몸의 방식이다.


글: 윤형신




《더 이상 자화상은 그리기 싫어》

김승규 개인전

기간: 2026. 3. 17. (화) ~ 4. 4. (토)

시간: 화~금 11시 ~ 18시

토 11시 ~ 17시

일, 월 휴관

장소: 이목화랑

서울시 종로구 북촌로 94, 2F

글: 윤형신

@daniel_johnston_jr @yeemockgallery @gudtls2178



이 글은 김승규 작가의 개인전 서문으로,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인용 시에는 출처 표기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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