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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신 Jan 27. 2022

묻지 않았던 질문과 미뤄졌던 답변을 시도하기

(이 글은 2021년 '뉴스페이퍼'를 통해 발간된 글입니다.)


    이 글은 살로니 매터의 글 「왜 전시사인가? Why Exhibition Histories?」와 그에 대한 에밀리아 테레치아노의 답변인 「복잡한 관계를 가능케 하기 Enabling Entanglements」에 대한 서평이면서, 올 한해를 정리하는 소회를 담은 글입니다. 그리고 이 글은 보리스 그로이스의 「국민 국가의 붕괴 시 뮤지엄의 역할」, ‘연대의 학교’에서 진행된 김항의 강연 ‘누가 아시아를, 제3세계를, 연대를 참칭하는가’, 부산현대미술관의 전시 《동시대-미술-비즈니스》와 《지속 가능한 미술관》, 그리고 최근 인사미술공간에서 열린 《월간 인미공 9월호》의 문제의식에 공명합니다. 1)


    “왜 전시사인가?”라는 제목으로 글을 시작하면서 살로니 매터는 연구 대상으로서의 전시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전시사에 대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집니다. 미술과 전시, 미술사와 전시사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전시사는 미술사 연구와 분리된, 혹은 부차적인 영역인가? 전시사를 말하는 것은 어떤 효용을 지니는가? 아마도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전시란 무엇인가를 고찰해야 할 것입니다.


    주지하다시피 전시는 사회적인 구성물이며 수많은 이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습니다. 매터는 전시가 예술이 경험되고 논의되는 방식을 결정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전시는 정보를 보여주는 방식을 구성하는 아카이브이며 캐롤라인 존스에 따르면 그 자체로 헤게모니적입니다. 2) 전시는 작가와 예술을 정전화하고 전시는 다시금 역사로서 정전이 될 가능성을 지닙니다. 그러나 정전은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정전화의 절차는 역동적입니다. 전시에서는 무엇이 포함되고 무엇이 배제될지가 논의되고, 이러한 과정은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가치판단을 요구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대립과 반목의 움직임(전시)과 이를 기술하는 것(전시사)은 정전에 도전하는 또 다른 역사들(Histories)의 가능성을 담지합니다.


    지금껏 우리가 눈여겨보지는 않았지만 아시아의 곳곳에서는 만들어진 장소에서 의미를 가지며, 세계적으로도 영향력을 가진/가졌어야 할 작품들이 있었습니다. 매터는 질문합니다. 이전까지의 전시와 전시사가 유럽과 아메리카, 그리고 그들의 미술을 정전화하는 데 기여해 왔다면, 전시와 전시사는 아시아의 미술과는 어떤 관련을 맺게 되는가? 전시사 서술은 이러한 예술 활동들을 이해하고 관계의 맥락을 읽어내는 효과적인 연구 방법이 될 수 있는가? 전시가 미술 작품, 그리고 미술을 상상하는 틀이며 전시사가 그에 얽힌 관계에 대한 기록이라면, 이를 다시 돌아보는 것은 미술의 범주를 재설정하는 움직임이 될 것입니다.


    매터의 글에서 잠깐 언급되었을 뿐이지만, 중요한 점을 한 가지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자신이 말하는 전시의 범주를 소위 ‘전통적인’ 방식의 전시에 국한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는 새로운 디지털 기술과 웹 플랫폼이 전시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를 묻습니다. 3) 2019년 9월에 던져진 조금 이른 이 질문은 COVID-19이 기승을 부리는 지금의 상황에 더욱 적절해 보입니다. 아시아의 미술에 관한 글의 논지와는 다소 상관없어 보이는 질문은 에밀리아 테라치아노의 답변에 등장한 한 예술가의 사례로 연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테라치아노는 인도 뉴델리에서 활동했던 예술가 므리날리니 무커르지를 소개합니다. 섬유를 작업의 재료로 사용하는 무커르지는 “환경” 4)이 “독특한 재료와 저렴한 노동력과 같은 어디서나 구할 수 없는 원료를 제공했기” 5)에 자신의 고향을 기반으로 작업했습니다. 무커르지는 그러나 동시에 이곳에서 작업한다는 이유로 차별을 겪습니다. 작품의 기반이 되었던 환경을 떠나 해외의 레지던시로 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으며, 작품이 매우 무거웠기 때문에 고향에서 전시장으로의 작품 운송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서구 중심적인 논의의 지반에서 역사・문화적 맥락이 탈락되거나, 작품의 수공예적인 속성과 작가의 국적과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으로 작품 비평의 틀이 고정되는 문제도 발생했습니다. 1990년 헨리무어조각신탁의 감독 로버트 호퍼가 레지던시 참여보다 작품 운송이 더 나을 것이라 무커르지에게 조언한 것은 글로벌 자본주의에서 흔히 일어나는, 가장 저렴한 곳에서 상품이 생산되는 은폐된 식민주의를 떠올리게 합니다. 여기에 더해 무커르지는 인도인으로서 발생하는 비용과 거처, 보험과 비자도 고려해야 했습니다. 6)


    그렇다면 무커르지의 사례로부터 30여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얼마나 많이 달라진 걸까요? 인류가 탄생한 이후로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인간은 아직 물리적인 몸을 탈피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는 AR과 VR 체험 또한 물리적인 공간이 존재해야 하며, 데이터를 저장하고 입·출력하는 물리적인 기기가 있어야 합니다. 작년과 올해 COVID-19로 인해 가시화된 문제들도 식사와 치료, 장례, 일터와 같은 몸과 관련된 문제, 그리고 임대료 지불과 같은 장소 점유의 문제들입니다.


    저는 미술에 있어 물리적인 것과 지역성을 함께 논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커르지의 사례에서 살펴보았듯, 물리적인 것은 ‘중요한’ 예술가와 작품을 선택하여 전시를 만들고 미술사와 전시사를 서술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예를 들어 지금보다 더 과거에는 사료를 구하는 일이 더욱 어려웠고, 직접 보지 못한 작품은 역사화 할 수 없었습니다. 인터넷이 발명된 이후에는 좀 더 상황이 나아져 웹을 통해서 미술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COVID-19 이후 전통적인 방식의 전시가 금지되자 웹상에서의 작품 감상은 물리적인 전시 공간의 형식을 의태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상의 가치들은 물리적인 기반 위에 세워집니다. ‘낙후된’ 인도 뉴델리에서 미술의 ‘중심지’인 헬리펙스(Helifax)로 작품을 운송하기 위해서는 대가가 필요합니다. 지방 사람들은 수없이 많은 미술대학이 있는 서울로 비행기를 타고 가서 입시를 치르고 명예를 얻습니다. 권력의 구도는 물리적 기반을 구성하고 물리적 기반은 다시금 권력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물리적 시공을 기반으로 하여 만들어진 불평등한 관계는 지식과 권력에 긴밀히 연결된 역사 서술에 반드시 영향을 줍니다.


    여기서 잠깐 올해의 광주비엔날레에 대한 간단한 인상을 이야기하겠습니다. 비엔날레가 보여주려 한 가치들에 공감하지만, 아름다운 작품들이 배열된 전시장의 광경을 돌이켜 보면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듭니다. 전후 관계를 역전하는 서술이겠으나, 이는 개별 작품들의 총합이 불러일으키는 ‘아시아’에 대한 기대가 전시장 바깥의 세계와 갖는 격차 때문일 것입니다. 과거・현재의 아시아란 세계의/미술의 갈등을 완화하는 대안이라기보다는, 세계의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던 곳으로 밀려났던 문제-그러면서도 역사적・지정학적인 특수성을 띤 문제-가 한꺼번에 떠오르는 물리적인 공간입니다. 그리고 또한 초국가적인 물류의 유통망과 여전히 견고한 국가의 장벽이 강력한 이해관계로 얽혀 움직이는 담론이기도 합니다. 거대한 전시는 여러 사람이 모이는 일이기에 이견의 평형을 지향할 수밖에 없고, 많은 기대와 자본이 투입된 만큼 미래 지향적인 가치를 제시함으로써 정당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압박이 부여됩니다. 그러나 잘 짜인 전시의 말끔한 얼굴이 아니라 그에 동반되는 사물들의 집합과 재배치, 유지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간의 갈등과 노동의 문제가 더 주목을 받아야 하는 게 아닐까요? 여기에 더해 김선정 대표이사의 갑질에 대한 얼마간의 문제 제기 외에 별다른 비평이 오가지 않은 것도 아쉬운 일입니다. 이러한 장면들을 보고 있자면 아무래도 빠르게 돌아가는 거대한 전시보다는 아귀가 맞지 않아 어그러진 채 대화를 촉발하는 작은 전시를 상상하게 됩니다.


    글을 마치기 전에 서두에서 논의되었어야 하는 질문을 제기해 봅니다. 그렇다면 전시의 범주란 어디까지인 걸까요? 주지하다시피 많은 작품과 활동이 전시장 밖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만큼 우리가 논의하는 전시의 범주를 좁게 설정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홍콩의 예술가이자 사회 운동가인 클라라 청은 우산운동이 일어난 다음 해 파라사이트(Para Site)의 회의에서 “직접적인 정치 행동을 위한 장소로서의 전시”라는 제목의 발제를 진행했습니다. 그는 예술의 행위는 아니지만 2014년 등반가들이 구룡반도의 사자 바위(Lion Rock)에 늘어뜨린 28미터짜리 현수막을 가시화와 신화・역사의 관계를 논하는 사례로 가져왔습니다. 그에 따르면 “나는 진정한 보통 선거권을 원한다(I want true/real universal suffrage)”고 중문으로 적힌 현수막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촉발하며 홍콩인들의 정체성에 대한 고찰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살면 개인적인 삶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구룡반도를 넘어 중심지인 센트럴로 가려는 소시민적인 “사자 바위의 정신(Lion Rock sprit)”은 이러한 전시 행위와 함께 정치성을 지닌 것으로 변화했습니다. 7)


    한편 작품이 어디에 위치하느냐도 문제가 됩니다. 바로 덴마크의 조각가 옌스 갈시외트(Jens Galschiøt)의 작품 〈국상지주(國殤之柱, Pillar of Shame)〉가 그렇습니다. 천안문사태를 추모하는 기념비적 조각의 형태를 한 작품은 1997년 홍콩에 도착하자마자 공공장소에 설치를 불허하는 의회의 검열을 받았습니다. 2년 동안 조각은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하고 빅토리아 공원과 홍콩대학, 홍콩중문대학, 링난대학, 홍콩침회대학, 홍콩과기대학, 홍콩이공대학, 홍콩시티대학, 그리고 다시 빅토리아 공원을 전전하다가 끝으로 홍콩대학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후 북경올림픽이 열린 2008년에는 작가와 시민들이 중국 내부에서의 인권침해를 상징하고 의견의 조화를 기원하는 오렌지색으로 조각의 색을 바꾸기도 했습니다. 8) 그러나 홍콩이라는 장소의 특수성이 반영되고, 시민들과의 상호 작용을 거치며 민주주의의 상징이 된 조각은 중국 정부의 탄압이 거세진 현재 존립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9)


    일상생활의 많은 부분이 온라인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지금 세계는 마치 시공을 초월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발붙인 시공이 명백해진 순간이기도 합니다. 10) 미술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은 미술을 둘러싼 시간과 공간의 맥락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아시아라는 시공 혹은 지평/관점에서 미술을 논하기 위해서는 묻지 않았던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서구 중심의 구도를 탈피해 미술의 중심지를 다변화한다는 명목을 가졌던 비엔날레는 앞으로 과연 어떠한 정당성을 얻을 수 있는가? 아시아의 미술 비평지는 누구의 언어로 쓰여야 하는가? 기후 위기의 상황에서 어떠한 방식으로든 환경에 영향을 남기는 작품의 운송·보관·관리를 윤리적인 관점에서 평가할 수 있는가? 11) 우리는 왜 작품을 어떠한 장소로 모으고 배치하려고 하는가? 우리는 왜 가시화되고자 하는가? 이러한 문제들은 권력과는 어떤 관계를 맺는가? 그 다음 의문을 연이어 촉발하는 수많은 질문은 매터가 던졌듯 “미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열려있는 질문과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수렴될 것입니다. 12)

          



2021 광주비엔날레가 열린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앞 분수대 광장에 광주 시민이 세운 패널과 민주주의를 기원하는 광주와 미얀마 작가들의 그림.



1) Saloni Mathur, “Why Exhibition Histories?” British Art Studies 13, September 2019. ; Emilia Terracciano, “Enabling Entanglements,” British Art Studies 13, September 2019. ; 보리스 그로이스(Boris Groys), 「국민 국가의 붕괴 시 뮤지엄의 역할 The Role of the Museum When the National State Breaks Up」 (1995). 부산현대미술관에서 《동시대-미술-비즈니스》를 위해 재출판. ; 김항, ‘누가 아시아를, 제3세계를, 연대를 참칭하는가’, 연대의 학교 (국립아시아문화전당과 서울시립미술관, 2020. 10. 9). ; 《동시대-미술-비즈니스: 동시대 미술의 새로운 질서들》 (부산현대미술관, 2020. 12. 11~2021. 3. 21). ; 《지속 가능한 미술관: 미술과 환경》 (부산현대미술관, 2021. 5. 4~9. 22). ; 《월간 인미공 9월호-이동하는 세계: 단축과 연장》 (인사미술공간, 2021. 9. 14~10. 2). ; 강민형, 국동완, 권태현, 김익현, 우춘희, 허연화, 『월간 인미공 9월호』 (2021).

2) Caroline Jones, “Histories and Hagiographies,” British Art Studies 13, September 2019, no page.

3) “What is the role of new digital technologies and web-based platforms (like this one) to the methodologies of exhibition history?” Saloni Mathur, Ibid., no page.

4) Mrinalini Mukherjee, “Knots: Interview with Marjorie Allthorpe-Guyton and William Furlong,” 1993, File 1, Archive of Moder Art Oxford (MAO), no page. 테라치아노의 글에서 재인용.

5) Emilia Terracciano, Ibid., no page.

6) Robert Hopper, The Henry Moore Sculpture Trust. “Letter to Sushma Bahl,” The British High Commission, British Council Division, New Delhi, India, 23 July 1990, File 5, Archive of Modern Art Oxford (MAO). 테라치아노의 글에서 재인용.

7) 클라라 청(張嘉莉, Clara Cheung)에 따르면 홍콩의 “사자 바위의 정신(Lion Rock sprit)”이란 1972년부터 상연된 “사자 바위 아래서(Under the Lion Rock)”라는 제목의 연속극에서 비롯되었다. 연속극이 서민들의 삶을 그려냈던 시기 홍콩은 급격한 경제 성장의 길을 걸었으며, 이와 함께 우산운동 이전의 탈정치적인 홍콩성으로 이야기되는 “사자 바위의 정신”이 형성되었다. 70~80년대 “사자 바위의 정신”이란 경제 성장을 기반으로 한 더 나은 홍콩에 대한 믿음과 열심히 일한 모두에게 균등한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의미했다. 그러나 본문에서 언급했듯 반환 이후 홍콩은 또 다른 변화를 겪는 중이다. Clara Cheung, “Exhibition as sites for direct political action: Myth-making and/or Art-making in relation to the cultural identity development and political movement in Hong Kong,” Para Site International Conference, September 2015, https://vimeo.com/149369046 (2021년 10월 17일 검색).

8) 김홍범, 「국보법이 할퀴는 홍콩.. 톈안먼 시위 추모 ‘수치의 기둥’ 없앤다」, 『중앙일보』, 2021년 10월 10일, https://news.v.daum.net/v/20211010134526474 (2021년 10월 17일 검색).

9) 조지훈, 「홍콩 공공미술의 정치화: 홍콩인의 삶의 방식 견지를 위하여」, 『현대미술사연구』 29 (2011): 116-121.

10) 박주연, 「코로나19는 세상을 바꾼 게 아니라 세상을 드러냈다: 재난 상황에서 사회적 소수자들이 처한 위기」, 『일다』, 2020년 5월 20일, https://www.ildaro.com/sub_read.html?uid=8735§ion= sc1§ion2= (2021년 10월 17일 검색).

11) “한편, 뮤지엄의 수장고에는 거의 조달이 불가능한 막대한 비용이 들어간다. 그 결과 경제적이거나 좀 더 생태학적인 문제의 핵심이 드러난다. 점점 더 속도를 올리며 몸집을 불려가는 역사 뒤켠의 거대한 쓰레기 구덩이에서 무엇을 꺼내어 뮤지엄으로 이동시켜야 하는가?” 보리스 그로이스, 위의 글, 2.

12) “How can exhibition histories go beyond or exceed current approaches in art history, or indeed the category of “art” itself?” Saloni Mathur, Ibid., no 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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