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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신 Dec 15. 2021

모래성 쌓기

금천예술공장 12기 입주작가 전문가지원 프로그램

    임노식 작가가 최근 그린 그림들은 무척 조용하게 느껴진다. 그의 그림에서 사람의 말소리나 바람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모래 더미에 머리가 사선으로 박히는 장면 또한 소리를 제거한 비디오처럼 스러지는 한순간을 고요하게 담아냈을 뿐이다(〈Sand sledding slope 05〉, 2020). 그림이 적막한 이유는 작가의 관심이 대상에 감정을 투사하고, 귀를 사로잡는 이야기를 구축하는 것보다 이미지를 탐구하는 데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작가는 원하는 이미지에 가까워지면 그만큼 이미지가 다시 멀어진다고 말했다. 이는 머릿속에 어렴풋하게 맴도는 무언가와 결과물의 불일치에 대한 토로이면서, 작가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대상과의 거리를 암시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이를 고려했을 때 그림의 소재 중 하나가 눈으로 감각 가능한 표면의 유실을 잠시/무한히 지연한 준설토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어쩐지 그림 속 사물들은 컴퓨터의 배경화면(wallpaper)이나 3D 프로그램으로 구축한 조각처럼 손안에 쥘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림에 문득 떠오른 이들 또한 작가와의 심리적 거리감을 고요히 내비치는데, 일례로 얼굴이 지워졌거나(〈landscape_14〉, 2017) 표정을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멀리 서 있는 익명의 인물들이 그러하다(〈landscape_17〉, 2017). 흥미롭게도 최근작인 <recipe 02>(2021)에는 소리를 지시하는 만화적인 기호가 등장했다. 작가는 타격의 감각과 소리를 염두에 두었다고 말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공감각을 불러일으킨다기보다는 눈으로 감각하게 되는 한 겹의 이미지로 작동한다.


   이전까지 작가는 고향인 여주와 작업실이 있는 서울을 오가며 대상과 화폭의 물리적인 간극과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시차의 변주를 실험했다. 그러나 부유하는 풍경으로부터 이동의 과정에서 피곤을 느끼고 땀을 흘리는 신체의 체험을 짐작하기란 어렵다. 오히려 그림에서 발견되는 간극의 성질은 〈Solmi road_04〉(2019)에서와 같이 어두운 산길을 지나는 차의 계기판이 내비친 냉정함과 닮았다. 그리고 작가가 움직이는 시공의 틈을 타 사물들은 생경한 모습으로 눈앞에 출현한다. 이와 같은 거리감은 최근 작가가 탐구 중인 인터넷에서 발견한 이미지와 더불어 (그의 말에 따르면) “대상을 본 순간부터 보정되기 시작하는 (대상의) 이미지”들에서도 희미하게 변주되며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표면에서 떨어져 나와 공기 중에 부유하고 있을 것만 같은 그의 감각 기관과 달리 전시장에서 거대한 그림을 마주한 관객은 보는 일이란 몸을 쓰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문득 깨닫게 된다. 《Pebble Skipping》(보안여관, 2020)에 이어 최근에 열린 전시 《Cast》(d/p, 2021)에는 건물의 벽과 같은 크기의 캔버스가 등장했으며, 후자의 경우는 이병호의 조각이 함께 전시장을 채웠다. 이와 같은 제약은 관객을 화면으로부터 물러나게 하기보다는 그림의 작은 파편들을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게 한다. 감상의 출발점이 되는 낱낱의 이미지들은 포토샵으로 걸러낸 듯 색과 형태가 나뉘어 있고, 드로잉이 담긴 작은 사각형들의 생김은 오래된 브라운관 텔레비전에 송출된 영상을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그의 대지(artboard)는 손끝으로 훑으면 미끄러지는 모니터의 화면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한 예로 매끄러운 이미지와는 달리 공중으로 뻗은 캔버스의 솔기는 자신이 물리적인 공간 속의 존재임을 강력하게 선언하며 그림의 표면을 감각하도록 관객을 끌어들인다. 


   전보다 한층 얇아져 캔버스의 흰 바탕이 비치는 물감층을 들여다보면 빳빳한 붓털의 흔적이 담긴 붓 터치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림에서 붓질은 풍경의 결에 조화를 이루거나 그와는 다른 층위에 새겨지고, 붓질로 이루어진 그림의 살결은 각기 다르게 빛을 반사하며 숨겨진 형상을 드러낸다. <recipe 02>의 경우 화면에는 모래톱에 각인된 물결의 흔적을 닮은 붓 자국과 그것으로부터 유래한 듯한 유기적인 무늬가 그려졌다. 그러나 무늬는 붓질에서 파생된 것이라기엔 붓질의 모습을 반복함으로써 강화하고, 거꾸로 붓질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최근 작가는 기존의 형상을 덮어 지우거나 그리지 않고 비워둠으로써 형상을 만들고 있다. 붓질과 무늬가 서로를 환기하듯 그린 것과 그리지 않은 것은 상대를 가리키고, 그림 속의 그림들 또한 그것이 담긴 캔버스와 재귀적인 관계를 맺는다. 그러고 나서 밖으로 눈을 돌리면 전시장에 마주 세워진 두 개의 캔버스가 서로의 대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된다. 


   잠시 이참에 물러나 ‘레시피’라는 제목으로부터 작가의 그림에 관한 생각을 전개해보자. 대개 친절한 레시피란 재료와 과정을 넘어 결과물인 요리의 맛을 상상하게 한다. 그러나 작가가 제시한 레시피는 순차적인 감상의 과정과 결과를 알려주지 않는다. 캔버스에 올려진 이미지는 오히려 포토샵의 대지에 흩어 놓은 오브젝트들에 가깝다. 나름대로 화면이 분할되어 있어 언뜻 컷 만화의 구성을 떠올리게도 하지만 독자를 잡아채는 이야기가 기입되어 있지는 않다. 만화의 경우 시간의 단면이라 할 수 있는 분절된 장면들을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혹은 무언의 약속에 따라 눈으로 도약하면 되지만 광활한 화폭에 산개한 이미지를 마주하면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읽어야 할지를 고민하게 된다. 때문에 〈recipe 01〉(2021)의 거대한 화폭에서 개구지게 웃고 있는 작가의 얼굴은 그를 올려다보는 관객을 향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을 더욱더 의미심장하게 만드는 것 중 하나는 그림에 등장한 맥거핀(MacGuffin)이다. 여기서 맥거핀이란 앞서 언급한 〈recipe 01〉의 상단에 그려둔 작가의 얼굴이나 막대기를 쥐고 서 있는 사람의 한쪽 귓가에 고개를 내민 자그마한 꽃송이와 같은 것들을 말한다(〈recipe 03〉, 2021). 알다시피 맥거핀은 의미가 비어 있어 결말과는 상관이 없지만 감상자를 작품 안에 끌어들이는 미끼로 작동한다. 여기서 짚자면 필자는 “그림에 등장한 맥거핀”이라 했을 뿐 “화가가 그림에 맥거핀을 심어두었다”고 적지는 않았는데, 그 이유는 개구진 작가에게는 재미 삼아 이미지라는 레고 블록을 흩어 둔 게 아니냐는 혐의가 더 어울리며, 의미심장한 이미지들이 작가가 의도하여 삽입한 장치가 아니라 필자가 그에 멋대로 맥거핀이라는 의미를 부여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슬그머니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임노식 작가님에 대한 윗글은 금천예술공장의 2021년 12기 입주작가 전문가지원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이 글은 김맑음 독립 큐레이터님과 작성한 원고 중 제가 쓴 부분을 금천예술공장과의 논의 후 개인 아카이브를 위해 브런치에 올린 것입니다. 합본은 아래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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