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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신 Oct 09. 2021

하얀 곳으로 가라

박승희 개인전 [전시 리뷰]

박승희 개인전

하얀 곳으로 가라

ANA 갤러리

2021. 9. 1 ~ 9. 14.

[전시 리뷰]


단단한 물질의 속성을 초월한 광물의 신이자 전시의 주인공인 ‘젤리신’은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박승희가 쓰기 시작한 ‘광물사회학’을 기원으로 한다. 광물이 살아 움직인다는 상상에 기반한 『광물사회학』(2010)은 실상 사회학 논문이 아닌 소설로, 작가는 이야기를 쓰는 데 있어 허구로써 현실을 풍자한 소설가 장 그노스(Jean Gnos)의 책 『인간과 사물의 기원』(열린책들, 2006)을 참조했다. 글과 그림, 조각으로 지어진 이전의 작업이 광물 세계의 평민인 광물에 대한 것이었다면, 이번 전시에는 젤리신의 모습을 담은 그림과 하늘에서 울리는 듯한 어조로 적힌 「젤리신의 말씀」(2021)이 벽에 걸렸다.


작가에 따르면 『광물사회학』은 광물과 인간의 “대략적인” 관계를 “어렴풋이” 알아보는 “학문적 연구”의 보고서다. 소설가 장 그노스가 유럽 어드메, 대략 프랑스 즈음에 사는 이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노래(song)’의 철자를 뒤집어 스스로 가명을 지은 한국인인 것처럼, 태초에 광물이 처음부터 “그냥” 있었다는 작가의 설명을 읽으면 심심해서 밍밍한 웃음이 난다. 자신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대놓고 털어놓는 장 그노스를 닮아 박승희는 자기의 기밀을 정직하게 드러낸다. 엉뚱하게도 작가는 『광물사회학』에서 종이컵을 광물의 후손이라 말했다. 소설이라는 알리바이가 있긴 하지만 빨대와 비닐봉지도 광물에서 유래한 것으로 얘기가 되니 과학적인 설명은 아니다. 심지어 그림에 그려진 젤리신의 육중한 근육 형태도 엄밀히 해부학적으로 꼬집으면 다 틀렸다! 그러나 작가는 개의치 않고 용감하게 작업을 진행해 나간다. 모두가 알다시피 ‘아무 말’의 논리를 진지하게 따지면 재미가 없어지는 법이다. 그러니 한번 그가 꺼낸 이야기의 삐뚤빼뚤한 솔기를 가볍게 무시해 보자.


사실 박승희는 회화뿐 아니라 이것저것에 관심이 많다. 일례로 그는 열심히 퍼포먼스를 한 적도 있는데, 〈아무것도 안 하기 10분〉(2014)이라는 제목의 작업에서는 가만히 있는 무의미한 행위로써 과도한 욕망과 논리로 가득한 세계에 격렬히 반항했다. 10분이라는 시간은 고행이라 하기엔 무겁지 않아 기록 영상에 비친 작가의 표정은 무료해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그는 퍼포먼스를 하는 게 심심했다기보다는 심심했기에 퍼포먼스를 했는지도 모른다.


한편 느슨하게 흘러가는 퍼포먼스의 시간과는 달리 이번 전시를 통해 모습을 드러낸 젤리신은 화폭 위에서 목표 지점을 향해 활발히 움직인다. 그러나 이들의 행동에는 마찬가지로 세계의 딱딱함을 중화하려는 요량이 담겨 있다. 원색의 색면이 돋보이는 초기작 <젤리신상도>(2007)에 이어, 활력 있는 붓 터치로 그려진 레몬색과 하늘색의 최근작(2020~2021)에서 젤리신들은 넘치는 에너지를 화면 밖으로 마음껏 표출한다. 그림 속 젤리신은 등 뒤에 꼬물거리는 형상이 생기도록 세차게 몸을 흔든다. 이들은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허허 웃으며 가운뎃손가락을 불쑥 내밀고, 변비도 안 걸릴 것 같은 말랑한 엉덩이로 알록달록한 색깔 똥을 싼다.


여기서 좀 더 들여다보면 젤리신의 말똥말똥한 눈에도 변천사가 있다. 그의 눈은 처음에는 갖가지 형태로 출발해 불가사리를 닮은 모양으로, 뒤이어 사방팔방 흩어지는 폭죽의 형태였다가, 지금은 별의 뾰족한 가장자리마저도 둥글려진 젤리 모양으로 모습이 바뀌었다. 동그란 얼굴에 콕 박힌 젤리신의 눈은 반들거리는 진주알처럼 욕망과 호기심으로 반짝인다. 하나 빛나는 눈에 담긴 호기심은 그 뒤에 꿍꿍이를 감추고 있지 않아 뚫린 곳을 마구 헤집는 무례함과는 다르다. 온갖 데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젤리신의 욕망이란 겨우 요만큼의 것이 아닐까 한다. ‘“이 썩으니까 조금 먹어!”라고 하지만 아이들은 꼭 많이 먹고 이를 썩게 한다.’


세속의 논리와 물질을 초월한 젤리신은 초능력과 향기로 광물, 그리고 광물을 이용하며 살아가는 인간과 소통한다. 젤리신은 성경 말씀과 같은 하늘의 언어로 광물들에게 명을 내린다. 그러나 작가를 닮아 엄숙한 그의 말씀에도 허술함이 늘 밥풀처럼 묻어 있다. 한 예로 (오래전 과학 시간에 배운 것을 떠올려 보면) 탄소와 수소의 만남이 만들어낸 이산화탄소, 수소와 산소가 결합한 물과 같은 암호는 독해하기에 그다지 어렵지 않은 수수께끼다. 젤리신은 실상 유일신도 아니라 화폭에는 크고 작은놈들이 등장해 웅성웅성 어딘가로 모여들거나 어깨동무를 한다. 이에 젤리신이 내린 ‘~하라’는 말들은 권위적인 명령이라기보단 무언가를 같이하자는 제안으로 들린다. 


그러나 「젤리신의 말씀」을 마냥 유쾌하게 읽고 덮기에는 이르다. 이번 전시에 선보인 작업에는 근래에 들어 더욱 뚜렷해진 기후변화에 대한 작가의 우려가 담겨 있다. 작가는 자연과 인간을 이분법적으로 분리하는 것에 문제의식을 느껴 젤리신의 이야기를 통해 무생물과 생물의 유기적인 관계를 말하려 했다. 그리고 그는 핀란드와 아이슬란드, 스웨덴의 레지던시를 방문하는 중에 마주한 구체적인 자연 풍경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하나 그런데도 의도와는 달리 젤리신 이야기에 드러난 자연이란 이분법적인 관점에서 구성된 이상화된 풍경으로 보인다. 이번 전시의 그림들은 주로 눈이 쌓인 태고의 풍경을 담고 있으며, 함께 제시된 텍스트에는 인간의 손이 닿지 않아 온전한 태초의 자연이 인간의 무분별한 행위로 인해 파괴된 것으로 그려지고, 근미래에 인간에게 위협으로 다가오게 될 강력한 위력을 지닌 것으로 서술된다. 그러니 작업에서 드러난 자연이란 인간적인 상상을 통해 소환된 추상적인 대상으로, 인류 문명의 상대항이다. 또한 원시성에 대한 탐구와 더불어 자유로운 화풍과 활기찬 젤리신의 춤동작은 원시주의적인 관점에서 탈문명을 말한 20세기 초의 야수파를 떠올리게 한다. 다시 말해 『광물사회학』이 광물을 의인화한 존재로 그리고 있듯 젤리신 이야기의 세계관이란 자연을 지향하지만 결국 인간적인 관점을 취하고 만다.  


여기에 더해 기후 위기를 미술의 언어로 논하는 것에는 모순이 존재한다. 작가만이 처한 상황은 아니지만, 인간의 잉여적인 행위라 할 수 있는 회화를 화이트큐브에서 전시하는 것은 인간의 과도한 생산과 소비가 촉진하는 기후 변화를 잠재우려는 의도와 일치되기 어렵다. 만약 관객이 그의 작업에서 자연을 읽어낸다면 작가가 만들어낸 자연에 대한 인간적인 이미지를 보거나 유기적인 추상회화를 통해 생명체의 형태나 에너지를 연상하는 것일 터이다. 다시 말해 매체의 특성상 문제를 이차적으로 환기하는 그림은 위기에 대한 실질적인 해결책이라기보다는 현 상황에 적합한 세계관을 제시하려는 시도로 남을 수밖에 없다. 


다시 돌아와 박승희의 작업에 보이는 자유로운 태도에 초점을 맞추어 보자. 그의 작업에서 자유로움은 무한한 생산의 요구에 응수하는 ‘허튼소리’, 지배의 논리와 반대되는 탈권위적인 태도, 규정으로부터 이탈하는 유연한 사고로 나타난다. 기후 위기를 논할 때 흔히 비판의식 없이 소환되어 사람들에게 추상적인 공포감을 강요하는 재난의 이미지와 구별되는 그림은 긍정적인 에너지를 담고 있다. 그림 속 젤리신은 인간적인 모습으로 등장해 유일신의 말투로 말한다. 그러면서도 고정된 형상을 넘나드는 몸으로, 자연을 다스리는 위치에 인간을 올려놓은 인간중심의 종교관과 배치되는 세계를 제시한다. 이러한 설정에는 기존의 통념과 새로운 아이디어가 모순적으로 섞여 있다. 박승희는 기존의 법칙이 뒤집힌 허구의 세계를 짓고 유희로써 이성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지금의 위기를 돌파할 에너지를 만들고자 한다. 대지의 딱딱한 죽은 뼈에서 뜬금없이 물컹한 젤리신을 떠올린 것처럼 그는 엉뚱하고도 유연한 몸짓으로 자신의 답을 발견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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