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너의 첫사랑이던 나

나와 결혼하지 못한 사랑에게

by 이수연

지금의 너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사귀는 사람일까. 아니면 분명 사랑한다는 마음을 가지고서야 만나는 사람일까. 솔직히 나는 전자야. 사랑하지 않아도 사귀곤 했어. 익숙함과 친절함 또한 사랑이라면 사랑일 테니까, 모두가 사랑이 아니었다고는 하지 않을게. 내가 너를 소중히 하는 만큼, 나를 소중하게 생각했던 사람을 폄하하고 싶지는 않거든.

너 이후에, 내가 다음으로 정말 사랑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지금의 남편이야. 사실 너와 헤어지고 한동안 잊을 수 없어 술만 먹기도 했어. 술만 먹으면 네 얘길 했고, 내 친구의 모두는 너의 이름을 알고 있지. 지금도 가끔 술안주로 네 얘기가 나와. 그럼 나는 유난히 말이 없어져. 너를 기억하는 친구들은 지금의 남편을 만나 다행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럼에도 너를 만나 다행이었으니까.


너는 우리의 처음을 기억하니,


나는 우리가 처음 만난 순간을 나는 어제 일처럼 기억해. 우리는 열여덟이었고, 크리스마스이브였지. 친구가 홍대에서 하는 공연을 보기 위해 나와 나의 친구, 그리고 나의 친구이자 너의 친구와 너. 넷이서 지하철을 탔어. 기나긴 초록색 선을 따라 서울의 반을 돌았지. 너는 그동안 아무런 말도 없었어. 잘 웃고 말하는 나와 달리, 너는 굉장히 부끄럼이 많은 아이였어.

그날 공연을 보고, 우리는 번호를 나눠가졌어. 너도 음악을 하고, 나도 음악을 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어. 우리 나이에 공부가 아닌 다른 길을 가는 사람은 드물었고, 고등학교조차 다니지 않은 내게 동갑내기는 아주 드문 일이었거든. 그 뒤로 먼저 연락한 것은 너였지. 잘 들어갔냐고, 그런 얘기였던 것 같아.

키가 크지 않고 마른, 말 수가 적은 친구. 내가 보는 너의 첫인상이었어. 솔직히 호감이라고는 말 못 했을 것 같아. 그냥 비슷한 꿈을 꾸는 사람 정도로 봤던 것 같아. 그 뒤에 우리는 내 지하 작업실에서 다시 만났지. 너는 네가 만든 음악을 들려줬어. 완성되지 않지만 충분했던 음악, 너와 같은 음악이었지.


우리가 알게 되고 머지않아, 새해가 왔어. 우리는 열아홉이 되었고, 너는 고삼이 되었지. 너는 나를 좋아했고, 또 고민했지. 너의 중요한 순간을 나로 인해 망치는 게 아닐까, 그럼에도 날 좋아하는 마음을 접을 수 없었겠지. 환경 때문에 미루기엔, 너의 첫사랑은 너무나 강렬했었나 봐.


너에게 고백을 받지 못하고 삼 월이 되었어. 너는 교복을 입고 학교를 다녔고, 음악을 하겠다며 고등학교를 그만둔 나는 사복을 입고 출근을 했지. 나는 그날을 기억해. 화이트데이 때, 내가 딸기맛 막대 사탕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너는 주변에 있는 모든 편의점을 돌며 딸기맛 막대 사탕을 샀잖아. 그리고 분홍 박스에 그 사탕을 모아 내 작업실 문 앞에 두고 갔지. 퇴근을 하고 돌아온 나는 그 박스를 보자마자, 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어. 이런 일을 할 너 같지는 않았지만, 그냥 무슨 일인지, 바로 너인걸 알겠더라.


너는 첫눈에 내게 호감을 가지고, 나와의 대화를 통해 나를 사랑하게 됐다고 말했지. 근데 그거 알아? 네가 사랑한 나는 이미 지난 사랑 혹은 그 비슷한 것을 겪은 나였다는 것을. 나는 너 이전에도 다른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어. 사랑이라기 보단, 추억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오로지 사랑이란 나였을 너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지.


너를 사랑하게 된 순간


그럼에도 너에게, 나에게 처음 같은 사랑이 왔다. 나는 너에게 사랑을 느낀 순간을 확실하게 기억해. 오 월이었지. 너와의 약속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이상하게 마음이 두근거렸어. 이유를 알 수 없는 두근거림. 심장에 문제가 생겼나 생각하기도 했어. 그런 이상한 두근거림은 처음이었거든.


나는 바로 네게 연락을 했지. 내일 만날 수 있겠냐고. 내 마음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어서, 고 삼인 너를 붙잡아가며 만나자고 했어. 너는 말했지.


“너를 또 본다면, 나는 늘 좋아.”


그리고 다음 날, 공부하는 네가 방해가 되지 않게 나는 너희 집으로 향했지. 네가 사는 아파트 상가에서 돈가스를 먹었어. 참, 아직도 이런 걸 다 기억하네. 돈가스는 뜨거웠고 달고 짭조름했어. 그리고 내가 너네 집 앞까지 대려다 주었지. 너는 그게 내심 미안했는지, 내가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정류장에서 함께 버스를 기다려 주겠다고 말했어. 공부해야 하는 너의 시간을 뺏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되었지만, 나는 내 마음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그러자고 대답했지.

십 분이 지나도 버스는 오지 않았어. 차고지 다음 정류장이 너네 집 앞이었으니, 배차 간격이 늦을 수밖에 없었지. 너는 버스가 오는 방향을 한참이고 봤어. 그리고 내가 집에 갈 수 있을지 안절부절못했지. 그런 네 모습에 웃음이 나서 내가 네게 물었어.


“왜? 버스가 빨리 왔으면 좋겠어?”



그때 너의 대답을 지금도 난 기억해.


“아니, 안 왔으면 좋겠어.”



무뚝뚝한 네 입에서 그 말이 나온 순간, 나는 다시 심장이 뛰었어. 그리고 그걸 사랑이란 걸 알았어. 아무도 없는 초록색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마음이 설레고, 무거웠어. 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확실했지. 하지만 나에겐 남자 친구가 있었어.


내가 남자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너는 알고 있었지. 그럼에도 너는 나를 사랑했고, 나도 너를 사랑하게 됐어. 나는 솔직하게 너를 좋아한다고 그 사람에게 말했어. 그 사람은 너를, 나를 비난하지 않았어. 나이가 조금 있어서인지, 나와의 헤어짐도 가볍게 받아들였지. 그런 걸 보면 그 사람도 사랑이 아니었나 봐. 그냥 여자 친구가 필요했을지도 몰라. 어쩌다 걸린 사람이 나였을지도 모르지. 내가 사랑이 아님에도 누군가를 만나던 것처럼.

근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 있어. 그 사람은 여자 친구가 있는 것을 숨기고 나를 만났다더라. 서로에게 적당한 잘못을 저질러서 마음에 남지 않았나 봐. 그렇게 흘러간 사람이 기억도 흐릿하다. 아마 네가 그 사람 얘길 하지 않았다면 나는 잊었을지도 몰라.


당시 내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너와 내 마음이었어. 그 사람에게도 이 자리를 빌려 사과하고 싶어. 그가 나를 향한 마음이 무엇이었든, 어쨌거나 그는 나의 남자 친구였으니까. 하지만 그것을 후회하진 않는다고 분명하게 말할 거야. 나는 너를 사랑했던 것을 후회하지 않아. 그리고 그 전 사람을 사귄 것도 후회하지 않아. 그것 모두 나의, 너와의 순간이었으니까.


앞으로 너와의 이야기에서 어떠한 비난을 받더라도 나는 인정하고 사과하고 받아들이고 싶어. 이런 나 이지만, 숨기고 싶지 않아. 숨겨온 시간이 너무 길었거든. 그래서 말라가는 꽃이 아닌, 썩어가는 꽃이 되어 가는 것 같았거든. 이토록 아름다웠던 꽃이었는데.


너에게 남은 나는 어떤 사람일까. 볼드모트처럼 이름조차 불러선 안 되는 사람일까. 내 이름이 나오면 흠칫 놀라거나, 주변을 둘러볼까.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는, 너를 말하곤 해.

나는 네 이름을 자주 입 안에서 웅얼거려. 잊고 싶지 않거든. 너를 사랑한 나를, 미워하고 싶지 않거든.




작가 이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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