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스무 살이 되던 해

나와 결혼하지 못한 사랑에게

by 이수연

인생에 가장 큰 한 해가 있다면 그것은 열아홉에서 스물로 넘어가는 때가 아닐까. 고작 하나라는 수가 앞자리를 바꾸고, 어리숙한 것을 성인으로 만들어 버리니까. 우리 역시 어리숙하게, 어른이라는 이름을 가져야 했지.


열아홉의 마지막 날, 우리는 지하에 있는 내 작업실에서 커다란 종이에 글을 썼어. 우리가 앞으로 해야 하는 일과 이루고 싶은 것을 썼지. 너는 대학 입학을 커다랗게 적었고, 나 역시 그 옆에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라고 적었어.


실은, 나는 대학에 갈 생각이 전혀 없었어. 지금도 그래. 그 정도 돈을 들이고, 그만큼이나 돈을 벌 자신이 없거든. 그리고 굳이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딱히 부족한 적이 없었거든.


그런 내가 대학에 가고 싶다고 말했지. 그건 순전히 너 때문이었어. 너를 이해하고, 너와 같은 위치에 있고 싶었어. 내가 대학을 준비한다면, 재수를 하게 될 너를 이해하며 기다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러나 우리는 수능을 한 달 앞두고 헤어졌지. 나는 너와의 헤어짐과 동시에 대학 진학을 포기했고, 수능에선 친구들의 등급이 오를 수 있게 아무거나 막 찍고 잤어. 아마 너의 등수 밑에는 내가 있었을 거야.

그래도 너와 함께하는 동안 나는 공부를 하고 입시를 준비했어. 재능 없는 피아노를 연신 연습했지. 왜 작곡과는 꼭 피아노를 해야 할까. 기타를 치면 안 되나. 대학이 주는 기준에 관해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과정도 너와 함께라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어.


수능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수능이 끝나고 학교 밖을 나오는 동안 조금 눈물이 났어. 바람은 차고 수능이 끝나는 자식을 보기 위한 가족들이 학교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거든. 그중에 내 가족은 없었어. 나는 그 사이를 혼자 지나가야 했지. 그런데, 그렇게 지나가는 동안 너 역시 그럴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어. 너도 다른 이의 가족들의 사이를 혼자 걸어 나갔겠지.



열아홉에서 스물로


새해를 앞둔 우리는 어느 대학에 입학하겠다는 꿈을 쓰고 그 아래엔 함께 하고 싶은 일을 썼지. 워터파크에 놀러 가거나 꼭 가고 싶었던 음식점을 가는. 그리고 우리가 이룬 것을 하나씩 지워나가기로 했어. 종이의 마지막엔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


서로에게 했던 말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마지막 말은 “사랑해”였음이 분명해.


시계를 보며, 날짜가 바뀌기를 기다렸어. 오십육, 오십칠, 오십팔, 오십구, 그리고 영. 그렇게 우리는 스무 살이 되었지. 가장 먼저 했던 일, 기억하고 있니.

스무 살이 된 그 순간, 우리는 문 밖을 나가 근처 편의점으로 향했어. 그리고 술을 샀지. 술을 마셔본 적이 없으니 뭐가 뭔지 하나도 알 수 없었어. 종류는 또 어찌나 많은지, 뭐가 무슨 맛인지도 알 수 없었지. 결국, 우리는 어딜 봐도 달 것 같은, 술 같지도 않은 술을 샀어. 그리고 계산대로 향했지.


“신분증 좀 보여주세요.”


어딜 봐도 앳된 보이는 우리였을 거야. 우리는 각자 준비한 주민등록증을 꺼내며 편의점 아저씨에게 보여줬어. 편의점 아저씨는 우리의 나이가 성인인지 한참을 계산하고 있자 우리는 말했어.


“저희 올해, 스무 살이에요.”


편의점 아저씨는 시계를 보고 하루가 지난 것을 확인한 뒤 술을 건넸어. 우리는 그 술을 들고 작업실로 다시 걸어가는 동안 한 모금씩 마셨지. 커피 향 칵테일 같은 음료는 아무리 달아도 끝에서 올라오는 술냄새는 남아있었어. 이게 어른의 맛인가, 하면서 마셨잖아. 사실 지금 보면 그냥 음료수였는데.


술과 너


아, 기억났다. 너는 그때 그 종이에 술을 많이 마시지 말라고 말했지. 근데 사실, 지금 나는 술을 많이 마셔. 술을 좋아해. 너와 헤어지고 네 생각이 날 때마다 술을 마셨거든. 그러니까, 매일. 의지하듯 마셨어. 네가 없어진 나는 어느 곳에도 마음을 둘 수 없었거든.

지금은 의지하듯 마시는 것이 아닌, 즐기기 위해 마시려고 노력해. 물론 잔뜩 마셔버리는 날도 있어. 스무 살이 되고 내가 잔뜩 취해 너의 부축을 받으며 집에 돌아온 적도 있었지. 나는 취해서 너를 끌어안고 사랑한다 말하고. 지금 돌이켜 보니, 못 볼 꼴도 많이 봤네. 네가 없으면 안 될 정도로 마시기도 했으니까. 근데, 네가 있으니 그 정도나 마셨던 거야. 지금 나는 남편이 있으면 유난히 금방 취하곤 하니까.


그러고 보면, 나는 한 번도 네가 취한 모습을 본 적 없어. 너는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우리가 스무 살이 되고 우리 오빠랑 셋이 술을 먹은 적도 있었잖아. 그때 대학생이던 오빠는 어른들과 술 먹는 법을 가르쳐줬지. 부모님이 알려주지 못하는 것을, 우리 오빠가 알려주었어. 이층에 있는 호프집에서 우리는 소주를 마셨고, 이렇게 맛이 없는 것을 왜 마시나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 근데 이제, 정말 가끔 소주가 달 때가 있더라.

아마 너는 지금도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 나를 겪었으니 술 좋아하는 여자도 별로 안 좋아할지도 몰라. 너와 맞는 사람을 찾겠지. 그런 예로, 우리 남편도 술을 좋아해. 요즘은 운전해야 한다고 거의 마시지 않지만, 둘이서 술을 자주 먹어.


누가 되었건, 너와 하루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 지금 나는 남편과 작은 일을 나누며 기뻐하고 사랑하거든. 너를 만날 때의 나는 더 큰 행복을 바랐고, 지금은 작은 행복에 감사해. 아마 이런 내가 그때의 너를 만난다면, 미안하다는 말 대신 고맙다고 할 거야. 남편이 내게 늘 하는 말이거든. "미안해"가 아닌 "고마워."라고 말해달라고.


나를 사랑해주어서, 내게 이런 기억을, 경험을, 감정을 알려주어서 고마워.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네가 누구보다 잘 살 거라고 믿고 응원해 주는 것뿐이다. 오늘 네가 진심으로 웃는다면, 나는 기쁠 것 같아.




작가 이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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