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네가 마지막으로 남긴 약속

나와 결혼하지 못한 사랑에게

by 이수연

네가 이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아 할 거란 걸 알아. 하지만 나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할 것 같아 이렇게 남겨본다. 그때의 이야기를 말하지 않고, 우리의 끝을 얘기할 수 없을 테니까.


그와의 만남


내가 남편을 만난 것은 너와 헤어지고 시간이 조금 흐른 뒤였지. 음악을 하는 사람이었고 너와 닮은 점이 없었어. 그간 나는 술을 좋아하거나, 담배를 피우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었지. 하지만 그는 둘 다 좋아하고 심지어 내가 만나기 싫어하는 음악을 하는 사람이었어.

남편은 나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고 했어. 너는 나를 처음 본 순간 호감을 느꼈댔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지난 사랑을 경험했고, 너는 그 감정이 처음이었다는 것일까. 나는 첫눈에 반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그 마음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남편은 나를 본 순간 나와 결혼해야겠다고 생각했대. 나의 나이도, 이름도 알지 못하고.


그렇게 남편을 만났어. 몇 번의 만남을 했지만 나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지. 나는 만날 마음이 없다고 돌려가며, 하지만 확실하게 말했으니까.


“저는 음악 하는 사람은 안 만나고 싶어요.”


너는 이 말에 음악을 그만두겠다고 했지. 근데 남편은 그 말을 신경도 안 쓰더라. ‘그래서? 나는 내가 하는 일을, 그리고 너를 좋아해.’ 그런 식으로 말했어. 내가 좋아하는 형태의 사람이 되기보다 그 자체를 인정하고 그런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었지.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어. 그가 나를 사랑하는 그 마음을 가지지 않았어. 오히려 그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차라리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나를 사랑하고 아껴주는 사람인데. 하지만 그때도 내 마음의 중심은 너였지.

그를 밀어내기 위해 너를 이용하기도 했다. 네 얘길 하고, 너를 그리워하고. 그럼에도 그는 질투하나 하지 않고 내 말을 들어주었어.


“그랬구나, 힘들었겠다.”


그는 나의 지난 사랑인 네 얘길 들었을 때 그런 말을 했어. 그리고 자신의 첫사랑도 내게 얘기해주었지. 자신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고, 잊는데 걸린 시간은 팔 년이었다고. 그는 나를 이해해주었어.


그럼에도 나는 그를 믿지 못했다. 사랑은 끝나고 아픔을 주고 죄책감을 남기는 일이었으니까. 강하게 나를 떠나가라고 말했어. 나를 알지 못해서 사랑하는 거라고. 그는 그럼 너를 알려달라고 말했지.

그가 나를 만나러 오는 때, 나는 아무 약이나 찾아 한 움큼 삼켰어. 그간 그런 행동을 해본 적은 없었지. 하지만 이렇게 아프고 엉망이고 괴로운 나를 알면 떠나갈 거라 생각했어. 그렇게 나는 밤새 괴로움에 몸부림쳐야 했고, 떠나갈 거라 생각한 그는 그날 결혼을 결심했댔어. 이렇게 망가진 내 모습을 보고도 함께하고 싶다 말했어. 나는 이해할 수 없었지. 분명 너였다면, 이런 나를 부담스러워했을 테니까.


너는 상처가 너무 많아.


네가 나에게 늘 했던 말이지.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너의 단어야.


네가 아닌 사랑은 없을 것 같았어


그 뒤로 조금 마음을 열고 그를 몇 번 더 만났어. 너를 사랑했던 날을 기억하듯,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한 날을 기억해. 우리는 카페에 갔고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 그러다 문득 심장이 두근댔어. 너를 사랑했던 순간처럼. 그리고 눈을 보기 힘들어지고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지. 사랑의 순간이란 것은 참 의미 없는 날도 소중하게 만들어주나 봐.

사랑하게 된 결정적인 말도, 행동도 없었어. 그냥 함께 커피를 마시다 사랑에 빠진 거지. 만약 내가 너를 겪지 않았다면, 그것이 사랑이란 걸 알지 못했을 거야. 그저 이상한 두근거림이라 생각하고 넘어갔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시작했어. 그것 또한 얼마나 마음 아픈 일인지 아니. 너의 기준에서 나는 너를 사랑해야 하는데,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이런 내 모습을 보면 네가 나를 질타할 것 같았다.

행복해야 하는 사랑의 시작에 네가 마음에 걸렸어. 그래서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내 마음을 다시 보려 했지. 이 사람을 만나면서 네가 나에게 온다면, 나는 어떡해야 할까.


마지막 약속


우리가 마지막에 한 약속을 기억하니.


“몇 년 뒤 오늘, 너를 찾을게. 다른 사람을 만나도 괜찮아.
결혼만 하지 마. 대학을 가고, 군대도 다녀올게.
그때 우리 다시 만나서 사랑하자.”


그때의 나는 고개를 끄덕였어. 그때쯤이면 너나 나나 많은 상황이 나아질 거라 생각했지. 하지만 그 시간은 생각보다 짧은 시간이었던 것 같아. 생각만치 많은 것을 변화시키진 못했으니까.

나와 남편이 만나고 사귄 지 한 달 만에, 나는 프러포즈를 받았어. 그는 나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지. 나는 긍정도 수긍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일단 알겠다는 말을 하고도 너와의 약속이 걸렸어. 그래서 나는 남편에게 그 마음을 솔직하게 얘기하기도 했지.


“그 애가 나를 찾아오면, 나는 그 애를 만날 수밖에 없어요.
우리에겐 약속이 있어요. 그 약속만큼은 지키고 싶어요.”



남편은 티를 내지 않았지만, 그날 너를 질투했었다더라.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야. 사랑의 전 사랑이니까. 지금 이 편지도 남편에게 보여주곤 해. 그럴 때면 남편은 얘기하지.


“너를 만나고 두 번째로 그 애를 질투하게 되네.”


하지만 그 질투는 나를 향한 비난이 아닌, 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으니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어. 그는 당연하게 그 마음을 받아들이고 조금은 장난스럽게 말하기도 했어. 그 덕에 나 역시 내 마음을 숨기고 불편해하면서 글을 쓰지 않아도 괜찮았지. 그는 그렇게 섬세하게 나를 배려하는 사람이야.


어쨌거나 결혼이라는 얘기는 이미 나왔고, 내게는 너와의 약속이 있었지. 원래는 머지않은 구 월에 결혼하려 했어. 그 해는 네가 나를 찾아오기로 한 때였지. 나는 여러 이유를 대며 결혼을 미뤘어. 혹시라도 우리가 헤어진 시 월, 약속한 그 날 네가 찾아올까 봐.

너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것이 아닌, 이 마음을 얘기하고 대화를 나누고 싶었어. 지금의 나의 마음과 비슷하게. 어린 마음에 행여나 너를 다시 사랑하게 될까 봐 걱정하기도 했지. 너라는 가능성을 지우기엔 나는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었으니까.


지켜지지 못한 약속


그 해, 시 월. 너는 오지 않았어. 네게 연락이 올까 봐 무서워하면서 번호조차 바꾸지 않은 나를, 너는 찾지 않았지. 그렇게 너도 다른 사랑을 만나고, 다른 삶을 사는 게 아닐까 생각했어. 어쩌면 그때의 약속은 헤어질 때 뻔히 하는 그런 약속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사실 너는, 기억조차 못할지도 모른다고. 너라는 가능성을, 나는 접어야만 했지.

그렇게 머지않아 나와 남편은 결혼 준비를 시작했어.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너에게 연락도 오지 않았지. SNS를 찾아봐도 너는 나오지 않았어. 마치 너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 같았지. 어쩌면 너도 철저하게 나를 지우고 싶었던 걸까.


그렇게 너를 잊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네가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나는 남편과 사랑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거라 기대했다. 네게 전화가 오기 전까지.




작가 이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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